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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에 대한 강박관념

언제부턴가 신문 기사 중에 '보수 단체/진보 단체'라고 하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특정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조직을 의미하는 이 단어가 왜 새로운 용어인가에 대해서는 우리들 스스로 가만히 한 번 5년 전의 신문기사 제목들을 상상해 보자.

참여연대, 경실련, 전경련, 민주노총, 전교조, 교총 등 우리가 익히 봐오던 정치적 성향을 지닌 이익집단들의 명칭들이다. 하지만 이들 단체의 이름들은 언제부턴가 진보 단체/보수 단체라는 대명사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바뀐 명칭들은 뚜렷하게 독자들이 기사를 읽기 전에 명백한 선입견을 부여하고자 하는 목적을 뚜렷이 내재하고 있다. 왜 이런 표현이 문제가 되는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개혁에 대한 본능에 가까운 지지와 보수에 대한 거부 심리
사회적 약자층은 대체로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현상타파 세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천지개벽과도 같은 로또 복권을 통해서 팔자 한 번 고쳐 보려는 것이나, 엄청난 공포정치를 통해서 부패한 정치인들은 전부 형장의 이슬로 만들어 이 나라 썩은 정치를 바꿔 보고자 생각하는 것은 청년 실업 200만 시대에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대표적인 현상타파 의지 중 하나다.

이와 같은 변화와 개혁에 대한 동경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것을 세도 정치에서 일제식민지로 이어지며 소위 힘없는 민초로서의 고통을 역사 교육과 언론을 통해서 끊임 없이 주입되고 고통을 인내하며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에서 찾는다.

한 때 '명성황후'라는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고서 방영되었던 TV드라마의 주인공 '민비'와 흥선 대원군은 대표적으로 무능한 지도층으로서 국내적 문제를 국제적 힘을 빌어 해결하려고 했던 어리석은 지도자에 대한 상징적인 존재다. 그들의 어리석은 결정은 그렇잖아도 식민제국주의가 확산되어가던 동아시아에서 조선의 식민지화를 가속화시켰고, 그들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고통 받은 것은 온전히 힘없고 불만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민초들이었다. 여기서 민비와 흥선 대원군은 그들의 봉건적 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수구守舊에 가까운)보수 세력이고, 그런 보수세력의 오판에 고통 받은 민초들은 현상타파 세력이며 그들은 그러한 점에서 개혁(진보) 세력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전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망해가는 국가의 정국'에서 나타나는 무능과 혼란이며 이것은 결코 우리만의 추한 모습은 아니다. 이러한 예를 드는 것은 나약하고, 권력과 동떨어져 있으며 민족 구성원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지을 능력이 거의(전혀) 없는 민초들이 필연적으로 개혁 지향의 진보적 성향을 띌 수 밖에 없는 메카니즘에 대한 (불필요하고 장황한) 예시이다. 이처럼 삶이 힘들고 지칠수록 사회적 약자층은 현상타파 세력이 될 수 밖에 없고 그러한 불만의 창끝은 필연적으로 보수 성향의 (상대적)지배 계층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국에서의 왜곡된 보수의 이미지
소위 '자칭' 보수 세력을 지향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자민련, 역시 '자칭' 진보 세력을 지향하는 열린당과 민노당의 대립 구도(이들 간의 내부적 갈등은 배제한다.)가 국내 정국의 대세가 되면서 과거 50년간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 왔던 자칭 보수들은 중대 위기를 맞고 있다.
역대 어느 시기보다 (행동하지 못하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反보수지향적 성향이 두드러지고 있고, 그들의 홈그라운드인 인터넷 상의 좁지만 넓은 무대는 적어도 온라인 상의 보수의 입지를 중우(衆愚)의 동의에 의한 이념적 획일화를 획책하고 있다.
지도층의 '자칭' 보수 세력 또한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고난과 갈등이 많았던 격동의 50년 간의 세월을 이겨낸 그들의 지배 논리에 도취된 탓인지, 이론적 자기 발전을 거부하고 무작정 한국적인 특수한 상황만을 제시하면서 그들 스스로의 자기 발전을 거부한 채, 지금은 비굴한 온라인 상의 전사들이지만 언젠가는 주요 투표집단으로 발돋움할 젊은층의 힘을 애써 과소 평가하며 그들의 영향력 밖의 제한된 집단에만 그들의 편향된 애정을 쏟았다.

이러는 과정에서 보수적 지배 논리(Conservatism)는 수구적 지배 논리로 오인되기 시작하였고, 시대의 변화에 적합한 보수적 논리를 제시하고 자기진화에 실패한 한국의 보수 세력은 진정한 의미의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는 보수적 정치이념을 대변하는데 실패함으로서 나와 같은 보수적 정치 이념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정향에 동의할 수 없는 대위기 상황에 봉착했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말만 앞서고 행동이 없는 젊은층에게 집중적으로 공격받고 그들로부터 철저히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제한되어 있지만 확실한 표밭이며 충실한 투표권자인 중장년층에게만 의지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그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 중대한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다.


보수세력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자칭' 진보 세력의 프로파간다[Propaganda]
'탄핵발의'와 '탄핵소추'가 집행되는 민주 국가에서 그 예를 찾기가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17대 국회라는 왜곡된 의회가 출범하였다. (1) 진정한 의미에서 군부 정권과의 관계를 (적어도 대통령의 레벨에서는) 청산하고 온전히 문민 정부로서 등장한 '국민의 정부'를 수구 세력으로 매도하며 분열적이고 갈등 조장적인 現자칭 진보 세력의 등장은 역대 어떤 정권보다도 더욱 갈등 지향적이고 무가치한 이념 대결의 성향을 보이고 있다. 자칭 진보 세력들은 그들 내부적인 갈등을 안고서도 그들의 공동의 적인 자칭 보수를 향한 창끝의 방향만은 돌리지 않았고, 보수라 칭하는 집단은 젊은 층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는 가운데 '보수 대결집'이라는 그들만의 구호 속에서 사분오열된 목소리를 하나로 뭉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처럼 이념적으로 보수로 분류될 만한 집단들이 '보수'라는 이름을 직접 입에 담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특히, 신문 지상에서 직접 '보수 세력'이란 문구로 자신들을 소개하거나, 소개 당하는 집단이 등장한 것은 바로 現정권에 들어와서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김영삼 정권의 등장 때부터 신문과 뉴스를 보기 시작했는데, 언론이 '보수 단체/보수 세력'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 정권이 처음이다. [더 엄밀히 따지자면 탄핵 정국이라 불리던 작년쯤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러한 표현을 구사하는 언론은 現정권의 어용신문으로 공인 받은 H모 신문과 자칭 인터넷 게릴라인 O단체(언론사가 아니다.)에 집중되어 있다.] 왜인가?

그것은 위의 단락들에서 쓰여진 '한국 사회의 왜곡된 보수에 대한 이미지'에 기인한다. '보수'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어느샌가 '反개혁적 성향'으로 자칭 진보 세력들이 탄압 받던 지하 투쟁 시절에 미디어 활동을 통해서 그들끼리 규정한 프로파간다에 의해서 왜곡되어 대중들에게 주입하기 시작하였다.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사고 능력이 지도층과 정치적 집단보다 떨어지는 대중들은 무의식 중에 '보수'라는 이미지를 그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한다.
이러한 프로파간다는 광범위하게 작업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보수의 프로파간다는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지만 효율이 떨어지고, 진보의 프로파간다는 낮은 비용을 투자하지만 효율이 높다. 그 까닭은 보수의 프로파간다는 지도층의 정책 결정을 대중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상명하복적 지도 과정이지만, 진보의 프로파간다는 언뜻 듣기엔 민중의 편에 서 있는 듯하면서 잔혹할 만큼 그들을 탄압하는 당대 정권에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모든 정치 집단은 권력층이 되면 보수집단화하게 된다.] 프로파간다는 인류가 집단활동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존재해 왔고,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은 그러한 프로파간다를 더욱더 용이하고 파급 효과를 높여준다.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권력층이 되어온 보수 집단이 그러했듯이 現정권의 권력 유지 과정은 우리가 겪어온 그 어떤 보수 집단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만큼 더 선동적이고 세련되어졌고 교묘한 술책을 사용한다. 그것은 그들이 보수 정권의 탄압 속에서 제한된 재화를 가지고서 활용하던 시절에 익힌 노하우일 것이다.

(1) [美대통령 닉슨이 1974년 탄핵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탄핵 직전 자진 사퇴하는 사건이 있었고, 역시 美대통령 빌 클린튼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하원에서 탄핵소추 당했으나, 상원에서 부결되어 탄핵을 모면한 바 있다. 佛드골 대통령은 노무현이 한때 입버릇처럼 말하던 국민투표를 남발하다가, 결국 국민투표에 의해서 불신임되어 사임된 바 있다. 국민 투표는 대표적인 당대 정권의 유지를 위한 정략적 기만 행위다.]

[본문과는 무관하지만, 한국의 미디어에서 '진보단체'로 소개되고 있는 미국의 반전사위대에 가담한 민간 단체들. 이러한 미디어의 역할 속에서 은연중에 대중들의 의식 속에는 '보수단체=호전적이며 전쟁지향적'이라는 악의적인 이미지가 심어진다.목적을 가지고서 활동하는 편향된 미디어의 역할은 얼마든지 대중의 기호와 의식 세계를 좌지우지하며 선동할 수 있다.]



'개혁'이라는 단어에 대한 무차별적인 강박관념과 개혁이 가지는 딜레마
이처럼 '보수'가 죄악시되는 비정상적인 한국적 정치 풍토와 대중 문화 속에서 '개혁'이라는 용어와 선례를 무시한 '파격적인 제안과 인사'들은 조직의 생리와 지배 체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대중들에게 무비판적으로 환영 받을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되었다. 개혁이라는 수식어를 넣지 않으면 죄악시 되는 마냥, 한때 저마다 모두 개혁을 부르짖으며 자신들이야말로 개혁의 선두주자임을 너나 없이 주장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칭 보수진영에서 나온 요상한 카드가 '개혁적 보수'라는 그 씨조차 알 수 없는 사생아다. 물론 노무현의 '협력적 자주국방' 만큼이나 뒤틀리고 일그러진 엉터리 주장이었던 이 요상한 논리는 결국 내부적으로 엄청난 비난 속에서 사그라 들었지만, 우리 사회가 '개혁'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병적으로 집착하고 휘둘리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개혁은 어렵고 힘든 민초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해방 직후 공산주의가 혁명논리로서 민중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처럼 당신들을 잘살게 해줄테니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논리는 거의 대부분 다수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대중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하다.]
여기서 '개혁'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개혁은 필연적으로 갈등 관계를 필요로 하고 평온한 상태를 거부한다. 개혁은 언제나 현상타파적이며 기존 사회 체제를 부정한다. 개혁에 있어서 기존 사회 체제는 구태의 답습이며 개혁 논리에 의해 변화시켜야 할 피조물일 뿐이다. 혹자는 '개혁'과 '혁명'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지만, 단지 그 단계별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궁극적으로 그것들이 하고자 하는 '현상타파'라는 목적은 동일하다. 개혁논리을 강조하면 갈등이 조장되며 화합과 타협이 없어지고, 개혁논리를 후퇴시키면 그로 인해 획득한 민초들의 지지를 상실한다. 그러는 가운데 특별한 이데올로기적 마인드없이 개혁 세력을 지지했던 보통의 민초들은 혼란스런 정국에 지쳐 조금씩 현재의 개혁논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새로운 개혁 논리를 갈망하거나, 보수적 성향으로 돌아선다. 그러는 가운데 기존의 개혁론자들은 민초들에 의해서 또다시 타파되어야 할 구세력(보수/수구 등의 그들이 임의로 붙이는 명칭)으로 도태되고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졌다가, 20%대를 겨우 회복한 작금의 열린당의 꼴이 바로 이 꼴이 아닌가.


개혁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보수는 모든 악의 원흉이 아니다.
개혁을 극단적으로 추구했던 공산주의는 보수적인 자유진영과의 정면대결에서 패배했다. 보수를 극단적으로 추구했던 대한제국도 멸망했다. 민주당을 수구꼴통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창당했던 열린당은 핀치에 몰리자, 그 민주당과 연정을 모색했었다. 개혁세력이라 노래하던 열린당은 어느새 '중도좌파'라는 묘한 이름으로 자신들의 색깔을 불과 1년도 안되어 재정의내렸다. 그러면서도 열린당 신기남은 "개혁은 좋은 것이며 보수는 나쁜 것이다"라고 공식석상에서 발언할 만큼 '개혁찬양'에 심취해 있다. '개혁적 보수'라며 요상한 논리를 펼치던 한나라당은 어느새 '보수대결집'이라며 자칭 보수의 구심점임을 칭하면서도 당내부적으로는 '개혁하자'고 난리치는 요상한 구도다.

개혁은 우리에게 어떤 것인가? 어떤 것이 '개혁'이며 어떤 것이 '보수'이며 어떤 것이 '수구'인가? 우리는 그 규정을 내리기에 앞서 이미 매스미디어와 몇몇 선동 세력들에 의해서 보수와 개혁을 그들의 잣대에 맡겨서 판단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가? 아니, 자기가 그것을 포기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개혁만을 부르짖으면 타협을 거부하며 반대 세력을 수구세력으로 몰아 붙이는 그들이야말로 개혁의 아름다운 탈을 뒤집어쓴 진정한 수구 세력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못살겠다며 미국 유학/이민을 가길 희망한다. 그런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정치가 지배하는 국가 중 하나이며 우리가 진보 세력이라 '착각(이라기보다 미디어가 反부시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주입한 영향이 더 크다.)'하고 있는 美민주당조차도 그 베이스는 보수주의가 깔려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에 있는 보수는 좋은 것이고, 우리의 보수는 영원히 나쁜 것인가?

815 특집 'TV구술사'에 등장하는 해방 정국의 젊은 그들의 구술 역사 속에서 혹시 그들에 대한 경외나 존경/동정을 했던 적이 있는가? 그들이 살아온 그 격동의 세월 속에서 어쩌면 그들의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했던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그들 중 상당수는 지금 우리 언론이 '보수단체'라고 부르며 저평가하며 反사회적, 反미래지향적 집단인 마냥 매도하고 있는 조직의 핵심 구성원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다시 접하게 된다면 그들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말이 '아'다르고 '어'다르다. 어떤 의도로 글을 쓰고, 기사를 쓰며 방송을 내보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180도 바뀌어진다. 대한민국이 적통으로서 계승하고 있는 상해 임시정부(해방정국 당시, 상해임시정부급의 독립단체가 5군데나 있었으나, 상해임시정부가 한국의 적통을 이었다.)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가 구미위원회 활동 등을 통해서 젊은 시절 전체를 독립 운동에 투신하여 민족의 위한 삶을 살며 일본의 모진 고문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315부정선거 등 몇 차례 삐끗한 사건들로 그의 평생의 업적은 한순간에 미디어에 의해 욕심쟁이 영감, 민주주의의 역적으로 매도되었다. 반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정치깡패로서 진정한 민주화의 역적이며 서북청년단에 버금가는 반공청년폭력조직의 수괴인 김두한은 TV드라마 한 방에 바로 팬페이지가 생길 만큼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목적성을 가지면 누구든지 미화될 수도, 추악하게 그려질 수도 있다. 개혁과 보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도 이와 같다. 미디어가 어떤 목적으로 기사를 쓰고자 정하고 쓴다면 얼마든지 善人이 惡人이 될 수 있다. [ex. 815축전 행사장 태극기 반입요구 시위]

개혁은 절대善이 아니며 보수도 절대惡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가 특수한 목적을 지닌 정치적 집단의 프로파간다에 휘둘려 있다는 증거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 Favicon of http://likeivory.byus.net BlogIcon likeivory 2005.08.25 01:36 ADDR 수정/삭제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치적인 글로서는 보기 힘든 균형잡힌 글이었던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소위 '보수'라고 부르짖는 사람들, 그 사람들 중에서 기득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간단히 말해서 한나라당쪽 사람들..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매우 불건전하고 사회악적인 방법으로 권력과 기득권을 이어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다른 나라와 절대비교로 볼 게 아닌 것이죠. 우리나라의 '보수'라고 불리는(적어도 언론상에서) 세력들은 지금은 아니더라도 10년 전까지만 해도(지금도 가끔씩 그러지만) 거의 파시스트에 가까운 세력들이었습니다. 불리하다 싶으면 해묵은 색깔논쟁과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을 양분짓고 가지고 놀았습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우리나라 최대 신문사인 조.중.동이 있었습니다. 한겨례나 오마이뉴스를 말씀하셨는데 조중동에 비하면 그 세력이나 규모면에서 비교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그렇다고 한겨례나 오마이뉴스측이 옳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다만 세력의 문제일 뿐이죠) 물론 건전한 보수세력들도 있지만 그들이 과연 얼마나 수면에 떠 올라 있느냐에 있어서는 의문을 감추기가 힘듭니다. 말씀드리고 싶은건 지금 자칭 진보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비판하는 세력들은 '극우 파시스트'라는 것입니다. 언론에서 이를 단순히 '보수'라고 뭉뚱그려 버리니 말씀하셨던 '철없는' 사람들도 보수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건전보수를 옹호하는 면에 있어서는 언급하셨던 한겨례측이 오히려 조중동보다 더 적극적이고 진지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로 중요한건 언론이 제 역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보수고 누가 진보고 누가 극우 파시스트고 누가 급진주의자 인지. 객관적으로 보여줄 언론의 등장이 시급한 듯 싶습니다.

    • Genesis™ 2005.08.25 01:59 수정/삭제

      저는 그것보다, 조중동이 왜 자기들을 '보수'라고 칭하는지 그 의도가 궁금합니다. 단지 보수적인(때로는 꼴통적인) 논설위원 몇 명이 있다고 보수의 대변인이 되는 것은 아닌데 말이죠.

      사람이 평생 한가지 정향으로 살아가지 않듯이, 언론도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서 사건에 따라 분야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할텐데, 한국의 언론은 뚜렷한 피아(彼我) 구분이 있는 듯 합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대표 꼴통' 전여옥의 꼴통짓을 가지고서 한겨례와 조선일보가 다투는 꼴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