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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 Callinicos - New Mandarins of American Power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신간, '미국의 세계제패전략'이라는 책이다..

내가 이 책을 고르게 된 계기는 최근 내가 여러 교과목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Free Topic으로 진행되어서 나 혼자 다루고 있는.. 어차피 타인의 도움은 필요치 않다.. 공부는 혼자하고 토의를 함께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토의를 할 만큼 열심히 준비해 오는 이가 없기에 언제나 혼자 잘난 놈이 되어 버린다.. 난 그래서 우리 학교 우리 학과 애들이 싫다..) 신보수주의(Neo-Conservative)에 대한 글과 프리젠테이션을 작성을 하면서 참고문헌이 필요하게 되었고, 도서관에서 쉽게 취득할 수 없었던 최신간 3권을 긴급히 공수(?)하게 되는 과정에서 유독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와 알렉스 캘리니코스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리처드 A. 클라크는 약간 정치적 보복성 성향을 띄고 있는 면이 책 곳곳에서 묻어나는 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신보수주의, 흔히들 '네오콘'이라 불리는 무리들에 대한 도서는 대단히 흥미롭고 미국의 중심으로 하는 단일패권적 국제체제 질서 속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강한 리더쉽의 회복'이란 구호는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단 번에 눈과 귀를 멀게 만들어 버릴 것만 같은 달콤한 구호와도 같다..
굳이 따지자면 노무현 저 멍청한 소인배 녀석과 열우당 머저리들이 의회의 신성한 '대통령 견제권'의 발동인 '탄핵'을 반국가적 행위로 매도하며, 국가 불안을 야기하는 반동적 세력으로 야당에 대한 프로파간다를 퍼붓자 '정치에 극히 관심이 없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야당을 똥파리 193마리로 규정하며 맹비난을 퍼붓게 되는 꼴이라고 할까?


이러한 네오콘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그 동안 지극히 북미와 앵글로 색슨족, 그 중에서도 보수적 성향과 극좌적 성향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여기 또 한 명의 좌파적 성향의 지식인이 네오콘에 대한 비판적 성향이 담긴 글을 내놓았다..

다만, 조금 다른 것이라면 그는 짐바브웨 출신의 영국인이며, 그가 영국 노동당 중앙위원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의 멍청한 정치인들과 의회 정치가 극한으로 발달한 영국의 정치인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진 말기로 한다..)


사실, 이 책도 특별히 다른 점은 없다.. 저자가 짐바브웨 태생이라는 것만 제외하고 나면 그 또한 좌파 성향의 지식인이 내놓은 수많은 네오콘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선 지식인이 내놓은 도서 중 하나일 뿐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집필하여 국내에 출간된 다른 저서들을 살펴보면 그의 성향을 단 번에 파악할 수 있다..)
다만, 그의 저서를 굳이 띄워 보는 이유는 이 책이 메인 챕터와 서브 챕터 사이의 구분이 유럽인답지 않게 매우 직관적으로 잘되어 있고, 그 내용 또한 난이도가 상당히 낮아 어느 정도 국제정치관계에 관심이 있는 유저들이라면 충분히 그 내용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책을 올려 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서적을 읽는데는 언제나 냉철하고 흔들리지 않는 중도적 입장의 주관이 필요하다.. 좌파 성향의 서적들은 때로는 심각한 이상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민족과 국가의 개념을 붕괴시키고자 시도하는 경향마저 있기 때문이다.. 네오콘은 분명 미국과 미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극우적 애국주의자의 성향마저 보이고 있고, 한국의 일제시대로 따지면 무장 독립 투쟁 세력과도 흡사한 존재들인 것이다.. 단지 그들을 '미국인의 시각'으로 볼 것인지, '세계인의 시각'으로 볼 것인지의 차이만으로도 그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릴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섯부른 판단은 매우 위험한 시도가 될 것이다..

네오콘은 당신이 주장하는 어떠한 반박과 비난에도 완벽한 역공을 펼칠 수 있을 만큼의 이론적 실제적 정치적 소양을 갖춘 '극한의 엘리트 집단'이다..


Offspring - Neocon
[Splinter 2003]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cholic PeterGabriel™, Against All Odds..

Howard Zinn - Declaration of Independence

Howard Zinn 은 나에게 참으로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내 마음 속의 그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꿈'이며, '이상'이며, '미래'다..
[여기에 Noam Chomsky 까지 더하면 환상이다..]


그의 글은 진정코 '예리한 칼날'이며, '맹독의 침'이며, '반항할 수 없는 재갈'이다..

독기서린 눈으로 먹잇감을 고르고 나면, 예리한 칼날로 먹이를 난도질한다..
그러면서 먹이를 살아 있을 수 없을 정도의 맹독을 퍼부으며, 그들의 처절한 저항의 입에 강력한 힘으로 미리 재갈을 물린다..



때때로 너무 지나치게 강하게 몰아쳐서 거부감을 느끼는 자들도 본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단지, 독자가 그가 토해내는 '심연에서 쏟아지는 부조리함에 대한 고발'에 적응하지 못할 뿐이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세상은 때때로 비판적인 자를 매도한다.. '양비론'이 비난 받는 것과 같은 논리다..
이 사람도 비난하고, 저 사람도 비난하니 비난 당한 두 사람 모두 자신을 비난한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정당한 비난을 당했을 뿐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앙탈에 참지성인(지식인과 지성인은 명백한 차이를 지닌다.. 그들을 동일시하지 말라..)은 조소와 폭로로 응수 할 뿐이다..


동요하지 마라.. 냉정한 이성으로 몰아쳐라..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저항마저 비틀라..
그는 책 전반에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PeterGabriel™, Against All Odds..

'개혁'에 대한 강박관념

언제부턴가 신문 기사 중에 '보수 단체/진보 단체'라고 하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특정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조직을 의미하는 이 단어가 왜 새로운 용어인가에 대해서는 우리들 스스로 가만히 한 번 5년 전의 신문기사 제목들을 상상해 보자.

참여연대, 경실련, 전경련, 민주노총, 전교조, 교총 등 우리가 익히 봐오던 정치적 성향을 지닌 이익집단들의 명칭들이다. 하지만 이들 단체의 이름들은 언제부턴가 진보 단체/보수 단체라는 대명사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바뀐 명칭들은 뚜렷하게 독자들이 기사를 읽기 전에 명백한 선입견을 부여하고자 하는 목적을 뚜렷이 내재하고 있다. 왜 이런 표현이 문제가 되는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개혁에 대한 본능에 가까운 지지와 보수에 대한 거부 심리
사회적 약자층은 대체로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현상타파 세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천지개벽과도 같은 로또 복권을 통해서 팔자 한 번 고쳐 보려는 것이나, 엄청난 공포정치를 통해서 부패한 정치인들은 전부 형장의 이슬로 만들어 이 나라 썩은 정치를 바꿔 보고자 생각하는 것은 청년 실업 200만 시대에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대표적인 현상타파 의지 중 하나다.

이와 같은 변화와 개혁에 대한 동경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것을 세도 정치에서 일제식민지로 이어지며 소위 힘없는 민초로서의 고통을 역사 교육과 언론을 통해서 끊임 없이 주입되고 고통을 인내하며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에서 찾는다.

한 때 '명성황후'라는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고서 방영되었던 TV드라마의 주인공 '민비'와 흥선 대원군은 대표적으로 무능한 지도층으로서 국내적 문제를 국제적 힘을 빌어 해결하려고 했던 어리석은 지도자에 대한 상징적인 존재다. 그들의 어리석은 결정은 그렇잖아도 식민제국주의가 확산되어가던 동아시아에서 조선의 식민지화를 가속화시켰고, 그들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고통 받은 것은 온전히 힘없고 불만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민초들이었다. 여기서 민비와 흥선 대원군은 그들의 봉건적 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수구守舊에 가까운)보수 세력이고, 그런 보수세력의 오판에 고통 받은 민초들은 현상타파 세력이며 그들은 그러한 점에서 개혁(진보) 세력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전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망해가는 국가의 정국'에서 나타나는 무능과 혼란이며 이것은 결코 우리만의 추한 모습은 아니다. 이러한 예를 드는 것은 나약하고, 권력과 동떨어져 있으며 민족 구성원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지을 능력이 거의(전혀) 없는 민초들이 필연적으로 개혁 지향의 진보적 성향을 띌 수 밖에 없는 메카니즘에 대한 (불필요하고 장황한) 예시이다. 이처럼 삶이 힘들고 지칠수록 사회적 약자층은 현상타파 세력이 될 수 밖에 없고 그러한 불만의 창끝은 필연적으로 보수 성향의 (상대적)지배 계층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국에서의 왜곡된 보수의 이미지
소위 '자칭' 보수 세력을 지향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자민련, 역시 '자칭' 진보 세력을 지향하는 열린당과 민노당의 대립 구도(이들 간의 내부적 갈등은 배제한다.)가 국내 정국의 대세가 되면서 과거 50년간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 왔던 자칭 보수들은 중대 위기를 맞고 있다.
역대 어느 시기보다 (행동하지 못하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反보수지향적 성향이 두드러지고 있고, 그들의 홈그라운드인 인터넷 상의 좁지만 넓은 무대는 적어도 온라인 상의 보수의 입지를 중우(衆愚)의 동의에 의한 이념적 획일화를 획책하고 있다.
지도층의 '자칭' 보수 세력 또한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고난과 갈등이 많았던 격동의 50년 간의 세월을 이겨낸 그들의 지배 논리에 도취된 탓인지, 이론적 자기 발전을 거부하고 무작정 한국적인 특수한 상황만을 제시하면서 그들 스스로의 자기 발전을 거부한 채, 지금은 비굴한 온라인 상의 전사들이지만 언젠가는 주요 투표집단으로 발돋움할 젊은층의 힘을 애써 과소 평가하며 그들의 영향력 밖의 제한된 집단에만 그들의 편향된 애정을 쏟았다.

이러는 과정에서 보수적 지배 논리(Conservatism)는 수구적 지배 논리로 오인되기 시작하였고, 시대의 변화에 적합한 보수적 논리를 제시하고 자기진화에 실패한 한국의 보수 세력은 진정한 의미의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는 보수적 정치이념을 대변하는데 실패함으로서 나와 같은 보수적 정치 이념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정향에 동의할 수 없는 대위기 상황에 봉착했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말만 앞서고 행동이 없는 젊은층에게 집중적으로 공격받고 그들로부터 철저히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제한되어 있지만 확실한 표밭이며 충실한 투표권자인 중장년층에게만 의지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그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 중대한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다.


보수세력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자칭' 진보 세력의 프로파간다[Propaganda]
'탄핵발의'와 '탄핵소추'가 집행되는 민주 국가에서 그 예를 찾기가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17대 국회라는 왜곡된 의회가 출범하였다. (1) 진정한 의미에서 군부 정권과의 관계를 (적어도 대통령의 레벨에서는) 청산하고 온전히 문민 정부로서 등장한 '국민의 정부'를 수구 세력으로 매도하며 분열적이고 갈등 조장적인 現자칭 진보 세력의 등장은 역대 어떤 정권보다도 더욱 갈등 지향적이고 무가치한 이념 대결의 성향을 보이고 있다. 자칭 진보 세력들은 그들 내부적인 갈등을 안고서도 그들의 공동의 적인 자칭 보수를 향한 창끝의 방향만은 돌리지 않았고, 보수라 칭하는 집단은 젊은 층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는 가운데 '보수 대결집'이라는 그들만의 구호 속에서 사분오열된 목소리를 하나로 뭉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처럼 이념적으로 보수로 분류될 만한 집단들이 '보수'라는 이름을 직접 입에 담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특히, 신문 지상에서 직접 '보수 세력'이란 문구로 자신들을 소개하거나, 소개 당하는 집단이 등장한 것은 바로 現정권에 들어와서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김영삼 정권의 등장 때부터 신문과 뉴스를 보기 시작했는데, 언론이 '보수 단체/보수 세력'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 정권이 처음이다. [더 엄밀히 따지자면 탄핵 정국이라 불리던 작년쯤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러한 표현을 구사하는 언론은 現정권의 어용신문으로 공인 받은 H모 신문과 자칭 인터넷 게릴라인 O단체(언론사가 아니다.)에 집중되어 있다.] 왜인가?

그것은 위의 단락들에서 쓰여진 '한국 사회의 왜곡된 보수에 대한 이미지'에 기인한다. '보수'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어느샌가 '反개혁적 성향'으로 자칭 진보 세력들이 탄압 받던 지하 투쟁 시절에 미디어 활동을 통해서 그들끼리 규정한 프로파간다에 의해서 왜곡되어 대중들에게 주입하기 시작하였다.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사고 능력이 지도층과 정치적 집단보다 떨어지는 대중들은 무의식 중에 '보수'라는 이미지를 그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한다.
이러한 프로파간다는 광범위하게 작업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보수의 프로파간다는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지만 효율이 떨어지고, 진보의 프로파간다는 낮은 비용을 투자하지만 효율이 높다. 그 까닭은 보수의 프로파간다는 지도층의 정책 결정을 대중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상명하복적 지도 과정이지만, 진보의 프로파간다는 언뜻 듣기엔 민중의 편에 서 있는 듯하면서 잔혹할 만큼 그들을 탄압하는 당대 정권에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모든 정치 집단은 권력층이 되면 보수집단화하게 된다.] 프로파간다는 인류가 집단활동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존재해 왔고,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은 그러한 프로파간다를 더욱더 용이하고 파급 효과를 높여준다.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권력층이 되어온 보수 집단이 그러했듯이 現정권의 권력 유지 과정은 우리가 겪어온 그 어떤 보수 집단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만큼 더 선동적이고 세련되어졌고 교묘한 술책을 사용한다. 그것은 그들이 보수 정권의 탄압 속에서 제한된 재화를 가지고서 활용하던 시절에 익힌 노하우일 것이다.

(1) [美대통령 닉슨이 1974년 탄핵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탄핵 직전 자진 사퇴하는 사건이 있었고, 역시 美대통령 빌 클린튼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하원에서 탄핵소추 당했으나, 상원에서 부결되어 탄핵을 모면한 바 있다. 佛드골 대통령은 노무현이 한때 입버릇처럼 말하던 국민투표를 남발하다가, 결국 국민투표에 의해서 불신임되어 사임된 바 있다. 국민 투표는 대표적인 당대 정권의 유지를 위한 정략적 기만 행위다.]

[본문과는 무관하지만, 한국의 미디어에서 '진보단체'로 소개되고 있는 미국의 반전사위대에 가담한 민간 단체들. 이러한 미디어의 역할 속에서 은연중에 대중들의 의식 속에는 '보수단체=호전적이며 전쟁지향적'이라는 악의적인 이미지가 심어진다.목적을 가지고서 활동하는 편향된 미디어의 역할은 얼마든지 대중의 기호와 의식 세계를 좌지우지하며 선동할 수 있다.]



'개혁'이라는 단어에 대한 무차별적인 강박관념과 개혁이 가지는 딜레마
이처럼 '보수'가 죄악시되는 비정상적인 한국적 정치 풍토와 대중 문화 속에서 '개혁'이라는 용어와 선례를 무시한 '파격적인 제안과 인사'들은 조직의 생리와 지배 체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대중들에게 무비판적으로 환영 받을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되었다. 개혁이라는 수식어를 넣지 않으면 죄악시 되는 마냥, 한때 저마다 모두 개혁을 부르짖으며 자신들이야말로 개혁의 선두주자임을 너나 없이 주장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칭 보수진영에서 나온 요상한 카드가 '개혁적 보수'라는 그 씨조차 알 수 없는 사생아다. 물론 노무현의 '협력적 자주국방' 만큼이나 뒤틀리고 일그러진 엉터리 주장이었던 이 요상한 논리는 결국 내부적으로 엄청난 비난 속에서 사그라 들었지만, 우리 사회가 '개혁'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병적으로 집착하고 휘둘리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개혁은 어렵고 힘든 민초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해방 직후 공산주의가 혁명논리로서 민중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처럼 당신들을 잘살게 해줄테니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논리는 거의 대부분 다수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대중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하다.]
여기서 '개혁'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개혁은 필연적으로 갈등 관계를 필요로 하고 평온한 상태를 거부한다. 개혁은 언제나 현상타파적이며 기존 사회 체제를 부정한다. 개혁에 있어서 기존 사회 체제는 구태의 답습이며 개혁 논리에 의해 변화시켜야 할 피조물일 뿐이다. 혹자는 '개혁'과 '혁명'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지만, 단지 그 단계별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궁극적으로 그것들이 하고자 하는 '현상타파'라는 목적은 동일하다. 개혁논리을 강조하면 갈등이 조장되며 화합과 타협이 없어지고, 개혁논리를 후퇴시키면 그로 인해 획득한 민초들의 지지를 상실한다. 그러는 가운데 특별한 이데올로기적 마인드없이 개혁 세력을 지지했던 보통의 민초들은 혼란스런 정국에 지쳐 조금씩 현재의 개혁논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새로운 개혁 논리를 갈망하거나, 보수적 성향으로 돌아선다. 그러는 가운데 기존의 개혁론자들은 민초들에 의해서 또다시 타파되어야 할 구세력(보수/수구 등의 그들이 임의로 붙이는 명칭)으로 도태되고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졌다가, 20%대를 겨우 회복한 작금의 열린당의 꼴이 바로 이 꼴이 아닌가.


개혁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보수는 모든 악의 원흉이 아니다.
개혁을 극단적으로 추구했던 공산주의는 보수적인 자유진영과의 정면대결에서 패배했다. 보수를 극단적으로 추구했던 대한제국도 멸망했다. 민주당을 수구꼴통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창당했던 열린당은 핀치에 몰리자, 그 민주당과 연정을 모색했었다. 개혁세력이라 노래하던 열린당은 어느새 '중도좌파'라는 묘한 이름으로 자신들의 색깔을 불과 1년도 안되어 재정의내렸다. 그러면서도 열린당 신기남은 "개혁은 좋은 것이며 보수는 나쁜 것이다"라고 공식석상에서 발언할 만큼 '개혁찬양'에 심취해 있다. '개혁적 보수'라며 요상한 논리를 펼치던 한나라당은 어느새 '보수대결집'이라며 자칭 보수의 구심점임을 칭하면서도 당내부적으로는 '개혁하자'고 난리치는 요상한 구도다.

개혁은 우리에게 어떤 것인가? 어떤 것이 '개혁'이며 어떤 것이 '보수'이며 어떤 것이 '수구'인가? 우리는 그 규정을 내리기에 앞서 이미 매스미디어와 몇몇 선동 세력들에 의해서 보수와 개혁을 그들의 잣대에 맡겨서 판단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가? 아니, 자기가 그것을 포기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개혁만을 부르짖으면 타협을 거부하며 반대 세력을 수구세력으로 몰아 붙이는 그들이야말로 개혁의 아름다운 탈을 뒤집어쓴 진정한 수구 세력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못살겠다며 미국 유학/이민을 가길 희망한다. 그런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정치가 지배하는 국가 중 하나이며 우리가 진보 세력이라 '착각(이라기보다 미디어가 反부시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주입한 영향이 더 크다.)'하고 있는 美민주당조차도 그 베이스는 보수주의가 깔려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에 있는 보수는 좋은 것이고, 우리의 보수는 영원히 나쁜 것인가?

815 특집 'TV구술사'에 등장하는 해방 정국의 젊은 그들의 구술 역사 속에서 혹시 그들에 대한 경외나 존경/동정을 했던 적이 있는가? 그들이 살아온 그 격동의 세월 속에서 어쩌면 그들의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했던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그들 중 상당수는 지금 우리 언론이 '보수단체'라고 부르며 저평가하며 反사회적, 反미래지향적 집단인 마냥 매도하고 있는 조직의 핵심 구성원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다시 접하게 된다면 그들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말이 '아'다르고 '어'다르다. 어떤 의도로 글을 쓰고, 기사를 쓰며 방송을 내보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180도 바뀌어진다. 대한민국이 적통으로서 계승하고 있는 상해 임시정부(해방정국 당시, 상해임시정부급의 독립단체가 5군데나 있었으나, 상해임시정부가 한국의 적통을 이었다.)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가 구미위원회 활동 등을 통해서 젊은 시절 전체를 독립 운동에 투신하여 민족의 위한 삶을 살며 일본의 모진 고문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315부정선거 등 몇 차례 삐끗한 사건들로 그의 평생의 업적은 한순간에 미디어에 의해 욕심쟁이 영감, 민주주의의 역적으로 매도되었다. 반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정치깡패로서 진정한 민주화의 역적이며 서북청년단에 버금가는 반공청년폭력조직의 수괴인 김두한은 TV드라마 한 방에 바로 팬페이지가 생길 만큼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목적성을 가지면 누구든지 미화될 수도, 추악하게 그려질 수도 있다. 개혁과 보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도 이와 같다. 미디어가 어떤 목적으로 기사를 쓰고자 정하고 쓴다면 얼마든지 善人이 惡人이 될 수 있다. [ex. 815축전 행사장 태극기 반입요구 시위]

개혁은 절대善이 아니며 보수도 절대惡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가 특수한 목적을 지닌 정치적 집단의 프로파간다에 휘둘려 있다는 증거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 Favicon of http://likeivory.byus.net BlogIcon likeivory 2005.08.25 01:36 ADDR 수정/삭제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치적인 글로서는 보기 힘든 균형잡힌 글이었던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소위 '보수'라고 부르짖는 사람들, 그 사람들 중에서 기득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간단히 말해서 한나라당쪽 사람들..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매우 불건전하고 사회악적인 방법으로 권력과 기득권을 이어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다른 나라와 절대비교로 볼 게 아닌 것이죠. 우리나라의 '보수'라고 불리는(적어도 언론상에서) 세력들은 지금은 아니더라도 10년 전까지만 해도(지금도 가끔씩 그러지만) 거의 파시스트에 가까운 세력들이었습니다. 불리하다 싶으면 해묵은 색깔논쟁과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을 양분짓고 가지고 놀았습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우리나라 최대 신문사인 조.중.동이 있었습니다. 한겨례나 오마이뉴스를 말씀하셨는데 조중동에 비하면 그 세력이나 규모면에서 비교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그렇다고 한겨례나 오마이뉴스측이 옳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다만 세력의 문제일 뿐이죠) 물론 건전한 보수세력들도 있지만 그들이 과연 얼마나 수면에 떠 올라 있느냐에 있어서는 의문을 감추기가 힘듭니다. 말씀드리고 싶은건 지금 자칭 진보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비판하는 세력들은 '극우 파시스트'라는 것입니다. 언론에서 이를 단순히 '보수'라고 뭉뚱그려 버리니 말씀하셨던 '철없는' 사람들도 보수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건전보수를 옹호하는 면에 있어서는 언급하셨던 한겨례측이 오히려 조중동보다 더 적극적이고 진지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로 중요한건 언론이 제 역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보수고 누가 진보고 누가 극우 파시스트고 누가 급진주의자 인지. 객관적으로 보여줄 언론의 등장이 시급한 듯 싶습니다.

    • Genesis™ 2005.08.25 01:59 수정/삭제

      저는 그것보다, 조중동이 왜 자기들을 '보수'라고 칭하는지 그 의도가 궁금합니다. 단지 보수적인(때로는 꼴통적인) 논설위원 몇 명이 있다고 보수의 대변인이 되는 것은 아닌데 말이죠.

      사람이 평생 한가지 정향으로 살아가지 않듯이, 언론도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서 사건에 따라 분야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할텐데, 한국의 언론은 뚜렷한 피아(彼我) 구분이 있는 듯 합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대표 꼴통' 전여옥의 꼴통짓을 가지고서 한겨례와 조선일보가 다투는 꼴 같은..]

IRA(아일랜드 공화군) 무장투쟁 포기 선언

오랫동안 북아일랜드와 영국에 불안 요소로 작용하던 아일랜드 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 사실상 테러조직이다.)이 (강요된)자발적 무장해제를 영국시간 28일에 선언했다. 9.11테러 이후 변화하는 국제 사회 속에서 테러리즘에 기반할 수 밖에 없는 무장 활동이 현실적으로 한계에 이르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IRA의 무장 해제 선언은 IRA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IRA의 행위가 사빠띠스따 해방군과 유사한 경우처럼 무장 투쟁에서 정치 투쟁으로 변화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사빠띠스따 해방군은 최근 멕시코 정부의 마약밀거래 혐의에 대해서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는 모략이라며 반발하며 무장 투쟁을 할 수도 있음을 언급하며 평화적 투쟁노선이 흔들리고 있다.]

관련글 보기 : 비폭력 투쟁


북아일랜드 갈등의 역사와 종교갈등
종교에 대해 어느 나라보다 관대한 한국으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종교에 대한 세계인들의 첨예한 갈등과 대립구도는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12C이후, 영국의 식민지가 된 북아일랜드는 전략적으로 잉글랜드계와 스코틀랜드계 신교도의 이민(얼스터 이민)이 이뤄어졌고, 토착 켈트계 카톨릭 세력과의 충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전략적인 얼스터 이민으로 북아일랜드 지역의 종교비는 프로테스탄트계가 다수가 되었으나, 뿌리 깊은 켈트계 카톨릭의 반발은 이 지역의 불안 요소로 남았다.
결국 영국령으로 남길 바라는 프로테스탄트계와 자치독립을 원하는 카톨릭계가 충돌하였고 1919년 조직된 IRA를 통해 한층 조직적으로 활동한 결과, '아일랜드 자유국'(영국령 자치국. 국제연맹에 가입되기도 했으며 후에 국명을 '에이레'를 거쳐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개명)이 성립된다.

이후 피의 화요일(1972), 엘리자베스 2세의 사촌 마운트배튼 경 피살(1979) 등 갈등의 유난히 심각했던 갈등의 7~80년대를 거쳐, 1994년 비밀협상을 통해서 IRA와 영국이 정전에 합의함과 동시에 IRA계 신페인당과의 대화도 시작하여 1998년 Good-Friday 협정을 이끌어 내어 신구교 연합자치정부가 출범하면서 평화의 기운이 팽배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2003년 IRA에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를 향한 테러 정보 수집 사실이 밝혀지면서 연합자치정부는 붕괴되었고, 갈등이 지속되었으나, 2005년 7월 28일자(영국 시간)로 IRA지도부가 무장해제를 선언함으로서 다시 한 번 평화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현재 북아일랜드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영국 하원에도 10여석의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IRA 무장 해제의 배경
이미 3차례나 IRA에 의해 선언되었다가 IRA 스스로에 의해 무너진 바 있는 IRA무장투쟁 포기선언의 배경에는 더이상 테러 행위에 우호적이지 않은 국제 사회의 분위기를 들 수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자 오사마 빈 라덴의 사조직 '알 카에다'에 의해 자행된 9.11테러 이후 거의 모든 분야에서 국제 사회 패러다임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9.11테러를 계기로 일부 약자의 테러리즘에 대해 유화적인 시선을 보내던 세력들이 대거 강경한 반대 입장으로 돌아섬으로서 정규군이 아닌, 소규모 테러조직(IRA의 조직규모는 1000명 정도로 추정된다.)에 의해서 운영될 수 밖에 없는 IRA로서는 상당한 운신의 제약을 겪어 왔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9.11테러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미국의 IRA 지지 세력의 정향 선회와 IRA의 도덕성에 결정타를 날린 벨파스트 은행 강도사건(IRA측에서 밝힌 목적은 은퇴하는 조직원의 퇴직금 마련을 위해서 였다고 한다.)과 IRA 조직원이 올해 술집에서 시비 끝에 저지른 카톨릭계 청년 살인사건 등은 IRA를 지지하는 국내외 대중들의 지지 기반 자체를 흔들었고, IRA의 기반이 되는 대중적 지지를 상실하게 됨으로서 IRA 활동이 가지는 대의와 현실적 지지 기반을 상실했다는 지도부의 정황 판단이 무력적 항복과 다름 없는 '무장해제'라는 최후의 카드를 선택하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IRA조직원의 살인 사건과 관련해서 야기된 미국의 신페인당 지지 철회는 국제적 요인 중 가장 결정적이다. 여기에 최근 2차례의 런던 폭탄 테러는 테러 행위에 기반한 무장 투쟁을 하는 IRA의 존립 자체를 뒤흔들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건물에 그려진 호전적 내용의 벽화. 폭력 투쟁은 그들의 주된 정치 행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약자의 폭력은 강자의 더 강한 폭력을 야기할 뿐이다. 그들의 나약한 폭력은 그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안겨다 주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2004년 토니 블레어 총리와 버티 어헌 아이랜드 총리의 노력을 통해 평화 협정이 체결될 뻔 했으나, 무장해제 과정을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는 프로테스탄트계의 요구에 IRA가 반발하여 무산된 바 있는 '검증가능한 무장 해제'에 IRA측이 전격 동의하면서 비밀무기고 소각 등의 과정을 프로테스탄트 쪽의 참관을 허용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제시하므로서 여느 때의 IRA 무장해제 약속과는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 호응한 토니 블레어 총리가 '나의 아버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Father)'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유명한 살인테러범 'Shawn Kelly'를 가석방하면서 본격적인 화해의 제스쳐를 보내고 있는 현상황이 대단히 주목된다.


수 차례 약속을 어긴 IRA와 뿌리 깊은 영국의 불신과 평화 정착의 가능성
IRA에 대한 영국 프로테스탄트계 정치인들의 불신은 그 뿌리가 매우 깊다. IRA는 이미 1994년 최초로 정전을 약속하였으나, 1998년 IRA내부 급진파의 반발로 28명이 사망하는 테러행위를 자행하여 스스로 약속을 어겼으며 2001년에도 무장해제를 선언했으나, 지켜지지 않았으며 2002년 10월 테러준비 활동이 발각되면서 북아일랜드 자치정부를 스스로 붕괴시켰고, 2004년 11월 신페인당의 무장투쟁 종식 선언 또한 계속 지켜지지 않았다.

[불신으로 가득한 민주연합당(Democratic Unionist Party)의 카툰 갤러리의 한 장. 뿌리 깊은 불신과 분노는 북아일랜드의 참된 평화의 정착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 정도면 거의 북조선의 김정일 왕조의 김 국방위원장 동지 수준인데, 이러한 부정적인 선례와 약속을 밥먹듯이 어겨온 IRA에 대한 영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프로테스탄트계의 시선은 얼음처럼 차갑기만 하다. 민주연합당(Democratic Unionist Party)의 당수 그레고리 캠벨은 올해 겨울이 끝날 때까지 IRA의 행동을 예의 주시할 것이라며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것은 위의 국내외적인 압력에 IRA가 견디지 못한 것도 있지만, IRA가 무장 투쟁 대신에 천명한 '정치적 투쟁'이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환경적 요건이 북아일랜드 카톨릭계 집단에게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북아일랜드 의회에서 신페인당이 7석을 확보함으로서 제2 정당이 되어 정치적 수단을 통한 그들의 목적 달성이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평화적 수단으로의 전환만이 現국제질서 속에서 다시금 그들의 강력한 후원 세력이었던 미국의 지원과 국제사회의 지지를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는 점이 그들에게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국 사회의 이러한 불신은 그 누구도 아닌 IRA와 신페인당 그들 자신들의 과거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반드시 한 번은 그들이 감내해야 할 것들이다.

물론, IRA 내부에서도 급진 성향의 지도층은 무장투쟁 포기선언 철회를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들이 분리하여 평화노선에 장애가 되는 활동을 할 수 있음을 예견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대세가 무장투쟁 포기로 기울어 버린 現시점과 무장투쟁 포기에 따르는 실익이 경우에 따라서 더 클 수도 있는 현재의 국제 환경이 IRA와 신페인당 그리고 영국의 평화공존의 길이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음을 기대케 한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계속 글을 조금씩 써나갔는데, 아무리 봐도 내 글 같지가 않다. 막연히 사건의 전개를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글로 꼼꼼하게 표현하는 것에서 약간의 괴리감이 다가왔고, 생각보다 내가 모르는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내 글이지만,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글.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자연을 가까이 하면 자연에 죽어간다. [...?]

어젯밤에 북극해 연안 지역의 환경독소 오염으로 인한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볼 때, 대단히 충격적인 연구 결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북극해 연안은 순백의 눈만큼이나 환경 오염과는 담을 쌓은 지역으로 흔히들 인식되어 있다. 또 실제로도 그렇다. 북극해 연안에서는 그 흔한 공장도 찾아 보기 힘들고, 제대로된 도로도 없으니 자동차 매연이 끝없이 뿜어져 나올 리 만무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북극해 연안 그린랜드 동부 지역의 주민 500여명은 폴리염화비페닐(Polychlorinated Biphenyl, 이하 PCB) 중독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

PCB는 과거에 고온을 발생시키는 전기설비의 단열재나 공장에서 플라스틱, 고무의 유연제로 사용됐던 물질로서 인체에 치명적인 환경호르몬 12가지 중 가장 위험도가 높다고 하며 발암 물질로서 서구에서는 1970년대부터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러시아에서는 1993년까지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PCB는 자연분해 속도가 대단히 오래 걸려서 거의 100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한 탓에 분해되지 않고, 공기 중의 대류를 타고 또는 해류를 타고 북으로 북으로 향하게 되어 PCB물질이 북극 연안에 집중적으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염된 대기와 바다를 통해서 1차적으로 식물성/동물성 플랑크톤이 PCB에 오염되고, 이런 플랑크톤들이 새우에게 먹히면서 새우가 좀 더 고농도의 PCB가 축적되고, 새우는 물고기에게 먹히며 물고기에 새우보다 높은 농도의 PCB가 축적되고, 물고기는 물개에게 먹히면서 물고기보다 높은 농도의 PCB가 물개에게 축적되고, 물개는 곰에게 먹히고, 곰은 사람에게 먹히는 먹이사슬을 따라 PCB가 고도로 농축되어 생태계의 상층부로 옮겨갈수록 개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 먹이 사슬의 관계에 따르면 바닷물보다 물고기가 5000배나 PCB농도가 높고, 물개는 물고기보다 9배나 농도가 더 높고, 다시 곰은 7배가 더 높고 이런 식으로 하면서 곰과 물개를 먹는 그린랜드 주민의 단계에 이르면 바닷물보다 30억배나 높은 PCB중독을 일으킨다고 한다.


오염물질을 원천적으로 없앨 수 없는 현실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그린랜드 지역이 선택한 최선의 해결책은 주요 식단을 바꾸는 것이었고, 그것은 당연히 서구 식단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식단의 서구화는 그린랜드 주민들에게 전에 없던 새로운 질병에 노출되게 만들었다. 그것은 비만/당뇨/전립선암 등이 그것이다.
원래 그린랜드 주민들은 비만, 당뇨, 전립선암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린랜드 주민들이 서구 남성 환자 30%가 앓는다는 전립선암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에 대해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이유가 북극해 지역의 물개와 곰 등에서 섭취하는 지방, 특히 곰의 지방층에 함유된 오메가3가 가득한 불포화 지방산에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여기서부터 학자들 간의 의견이 엇갈렸다. PCB중독을 감수하고서라도 원래의 북극 지역 식단을 지키며 신종 질병으로부터 벗어 나는가, 서구식 식단을 고수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그것이었다. 그 중에서 현대화된 북극 식단의 고수[PCB농축 수준이 높은 간, 콩팥 등을 제외하고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한 지방층은 지금처럼 계속 먹는 식단]를 주장하는 PCB중독 연구에 20년을 쏟았다는 '드와이'라는 학자의 말이 참 인상에 남았는데, "자연을 가까이 하면 자연에 죽어 간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환경 오염의 주요인은 선진국과 도시에 있으며 PCB수치를 낮추기 위해 그것에 집중하면 다른 유사한 현상을 유발시키는 또 다른 오염 물질이 나타나며, 자신은 또다시 이와 같은 연구에 20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고, 이런 연구의 반복은 예산만 낭비하는 꼴이라며 열변을 토하며 가능성이 있는 모든 물질들을 즉각 금지시켜야 한다며 다소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다.



여기까지는 방송 내용의 줄거리 정리이고, 온전한 나의 글과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여기부터이다.

서구는 이미 오래 전인 70년대부터 PCB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자국 내에서 PCB의 사용을 금지시켰다.(마치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석면'을 프랑스 등은 벌써 발암물질로서 사용을 규제하는 것과 같은 논리랄까..) 하지만, 러시아는 1993년에 이르러서야 PCB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대체물질의 개발'이 되었는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93년 당시 옐친도 자국의 땅과 바다를 오염시키는 물질인 PCB를 계속 쓰고 싶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 어느 악덕 지도자라도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러한 물질들이 사용되는 것을 눈감아 주는 그런 지도자는 없다. 하지만, 옐친의 러시아는 1993년에 이르러서야 PCB를 금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PCB를 대체할 수 있는 물질의 개발이 그만큼 늦었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실제로는 다를 수 있으며, 전적으로 나의 유추다.)

캐나다 연구진들은 경유 자동차에서 무연휘발유를 쓰기 시작하면서 대기 중의 납 비율이 40~50% 감소했다고 연구를 발표했다. 경유보다 무연 휘발유가 환경에 더 낫다는 것은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나라에서는 무연 휘발유보다 경유가 더 많이 쓰인다. 이유는 무엇인가?

결론은 '재화과 기술력의 문제'다. 대체 물질을 개발하는 데에는 엄청난 재화가 필요하고, 그에 상응하는 기술력 또한 필연적이다. 하지만, 자본과 기술은 선진국 중에서도 최상위 몇 나라(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정도? 이 정도만 모아도 전세계 부의 75%는 모인다.)에 집중되어 있고, 이들의 기술 독점은 그들의 국가 경쟁력, 산업 발전 등과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군사력이나 '수퍼파워' 등과 관련지을 것도 없이 단순한 자본주의 논리를 가져다 대면 된다.


어떤 오염 물질이 있다고 하자. 그 오염 물질은 산업 발전에 필연적인 물질이지만, 환경 오염이 지나치게 크다고 할 때, 선진국들은 즉각 대체 물질 개발에 착수할 것이고 대체 물질을 개발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오염 물질을 대체한 물질로 깨끗한 물질로 산업 활동을 할 것이고, 그러한 자신감을 배경으로 '교토의정서'[미국의 교토의정서 조인 거부는 더이상 줄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근시일내에는 불가능한 이산화탄소 배출량 제한에 대한 압박 때문이지, 환경정책이 미국에 불리하기 때문이 아니다.]와 같은 환경 조약 등을 이용해서 대체 물질을 가지지 못한 제3국(주로 동일 산업 분야의 경쟁 국가)을 압박하게 된다. 그러한 압박을 받는 제3국이 대체 물질을 개발하지 못한다면 그 국가의 선진국과의 경쟁력을 가진 산업은 지구 환경을 중시하는 국제 사회의 제재를 받을 것이다.

'범지구적 차원에서 그런 대체 물질을 공유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만약 그러한 주장이 받아 들여진다면 앞으로 그 어떤 나라도 친환경적인 물질을 개발하기 위해서 먼저 앞장서서 개발하려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돈많고, 기술력 있는 국가들도 직접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신물질을 개발하기보다, 다른 나라들이 개발한 것을 무임승차하려 시도할 것이고, 개도국들은 당연히 선진국만 바라보게 될 것이다. 당연한 현상이다. 먼저 개발하면 개발 비용만 홀라당 날리는 꼴이 되니까.. 조직의 단위가 크면 클수록 인센티브 없는 자선사업(?)은 먼나라 이야기가 된다.

더구나 기술을 가진 국가들이 '범지구적 차원'이라는 이름으로 기술을 공유할 리도 없다. 기술이란 그 분야에서만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로 파급되고 응용되게 된다. 기술을 획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누구보다 선진국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지구를 지켜라!'라는 대의를 이해하더라도, 그렇게 낭만적인 친환경 기술의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러한 이유들이 상호 작용하기 때문이다. 막연히 '지구촌 의식의 강화'라는 구호를 외치기엔 인간의 본성에 너무나 충실한 냉혹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 만드는 장벽이 너무나 크다. 무작정 선진국들에게 리더쉽을 요구하기에도 힘들다. 앞서 나가 있는 것을 1보 더 전진하기는 어려워도, 뒤에서 밟아온 길을 쫓아오는 것은 훨씬 빠른 법이다. 그런 점들은 항상 선진국들의 목줄을 조여 든다.

정말 인간 문명이 살아 남으려면 존 제르잔의 말처럼 원시문명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도?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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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시대 (Surplus) - 노동의 종말

과잉시대 (Surplus)

감독: 에릭 간디니 (Erik Gandini)
소재: 35mm
색 : color
장르: 다큐멘터리
시간: 52분
제작연도: 2003년
배급: 필름메신저


그저께였나? 규암이와 '소비를 강조하는 문화'에 대해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타전공인 사회학과의 모 교수님을 통해서 접하게 된 Jeremy Rifkin'노동의 종말'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내 안에서 변화하기 시작한 자본주의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와 미래 인간의 생존 방법에 대한 아직은 다소 정리되지 못한 나의 견해에 대해서 규암이가 '자본주의적 논리'에 입각한 반발에서 비롯된 논쟁이었다.

기본적으로 Jeremy Rifkin은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부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Immanuel Wallerstein'세계체제론'에서 주장하는 해법처럼 해법을 제시할 순 있지만, 그 해법을 실행할 수 없는 숙명론적 결말처럼 인간의 원초적 본성에 가장 충실한 자본주의의 본질을 뿌리칠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에릭 간디니'의 단편 다큐멘터리 '과잉시대(Surplus)'는 '反자본주의', '反세계화'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이러한 자본주의의 끝없는 '소비만능주의''소비를 강요하는 사회'Fidel Castro(쿠바의 독재자)와 철학자 John Zerzan(99년 시애틀 반세계화 시위의 주동자)의 주장을 빌어 강하게 질타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적인 사회 구조가 선진국으로의 부의 집중을 더욱 심화시키고, 제3세계의 가난과 종속을 더욱 가속화시키며 궁극적으로 인간 문명을 말살시킬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20C후반부터 국제 사회에 본격적으로 내던져진 인류의 과제로서 우리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무겁고도 중대한 과제임을 에릭 간디니는 Industrial Rock(?) 스타일의 음악이 뒤섞인 영상과 사운드를 통해서 청자에게 전달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에릭 간디니'의 단편 다큐멘터리 '과잉시대'는 본질적으로 몇가지 문제점을 안고 출발한다. 그것은 과도한 이데올로기적 사고(에릭 간디니의 사고는 극좌파적 사고에서 출발한다.)를 담고 있다는 것, 자본주의의 대량소비/대량생산의 사회체제로 극단적으로 전이된 오늘날, 현실적으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극단적 결정(원시로의 회귀?)을 선택할 것을 우회적으로 강요한다는 점, 자본주의가 가져온 풍요와 인간 삶의 질의 향상이 무작정 부정적인 것인가에 대한 가치 판단의 미비, 엄연히 존재했던 폭력에 대한 미화와 폭력 행위에 대한 부정, 이분법적인 적아(敵我)의 구분 등을 나는 문제점으로 꼽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과잉시대'는 대중이 산업혁명 이후 200년 가까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세뇌적 교육과 사회 풍조를 통해 당연한 것으로 인식해 오던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대한 인간 사회의 문제의식의 태동과 조직적 저항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영상으로 담아 알리고자 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에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라고 하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은 인간 사회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시발점이며 원동력이다.
그러한 점에서 지금보다 어렸던 4년전, 지금보다 어리석고 아둔하던 나의 의식 세계에 충격과 이념적 흥분을 선사했던 '하워드 진'의 '오만한 제국'의 한 구절을 적어 본다.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속고 매수되고 선전당하고 징집당하고 위협당해 왔기 때문이다. 또 무장하지 않은 여자와 어린아이를 죽인다 해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명령에 복종하도록 혹독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작 놀라운 것은 그들의 일부가 그것을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 Howard Zinn, Declarations Of Independence [1991]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로 변화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조에 동의를 한다고 해서 나의 정향이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나는 언제나 단지 내가 합리적이다고 판단되는 것에 대해서 긍정하고 인정하며 수긍할 뿐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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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테러리즘

미육군 교본에 명시된 테러리즘의 의미는 '협박과 강압을 통하거나 공포를 조장하여 정치, 종교,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폭력의 계획적 사용'을 뜻한다. 이는 Noam Chomsky 또한 자신의 저서들에서 그대로 인용함으로서 전세계적으로 별다른 이견 없이 널리 통용되고 있는 테러리즘의 사전적 의미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테러리즘은 이러한 포괄적인 의미보다, 약자가 강자에게 비정상적인/비정규전의 방법으로 물질적, 정신적, 정치적 타격을 입히는 행위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테러리즘에 좀 더 근접한다. 즉,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테러리즘에는 패권국의 테러리즘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은 힘으로 규정된 국가 간의 힘의 분배 상태에 의해, 강자의 테러 행위는 '국제 경찰력' 내지는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며 그것에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그 행위를 한 국가가 소위 강대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라면 자국에게 특별한 위해가 가해지지 않는 한, 별다른 이견을 달지 않는다. [일단 터뜨리고 보는 우리 '노짱'조차도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했었다. 그 날 테러 발생 이후 약 1시간만에 5500여명이 사망하였고, 전세계는 역사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테러를 경험하였다.
통상 테러 행위가 벌어지면 몇몇 집단에서 자신들이 테러를 저질렀다고 밝히며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피력한다. 하지만 9.11 테러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그 행위를 자백하지 않았고, 미행정부는 그들의 오랜 동료(?)였던 이슬람 원리주의자 알 카에다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응징에 들어갔다. 응징이 길어지자, 알 카에다 스스로도 자신들이 9.11테러를 실행했음을 인정하며 이슬람권에 지하드를 요구하였다.

[그냥 가져다 붙인 것이어서 별로 의미는 없고.. 여러 군데서 동시다발적으로 테러행위가 저질러졌다. 사고가 발생한 지점들로 보아, 제대로 욕먹고 비난 받으며 그들의 목적 달성의 꿈은 요단강을 건널 것으로 보인다.]

2005년 7월 7일,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매우 전통적이고 매뉴얼한 형식(?)의 연쇄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비공식으로 40여명이 사망하고, 1000명 이상이 부상했다고 알려지고 있다.(어젯밤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300명 정도라고 하더니..) 테러가 일어나고 나서 피해 규모가 별로 부담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알 카에다 영국지부(점 조직/세포 조직)라고 밝힌 테러집단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히며 영국의 이라크 침공과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응징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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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테러리즘의 피해국이 보이는 반응은 미국식 반응과 필리핀식 반응이 대표적이다. 미국처럼 웃통 벗어 던지고 쌍칼들고 복수하러 뛰어드는 국가와 필리핀처럼 테러에 겁먹고 바싹 움츠러 드는 경우다.
실제로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외교력을 가진 국가라면 필리핀 같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토니 블레어와 G8정상들은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테러리즘은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응징을 다짐하고 있다.

관련글 :
비폭력 투쟁

나는 '약자가 행사하는 폭력'의 가치를 매우 낮게 평가한다. 약자가 내세우는 폭력은 그 한계가 명백하며 그 형태 또한 비정상적이고 비정규전적인 성향을 띄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들의 투쟁은 제3자에게 지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비춰지고, 그러한 제3자들의 부정적인 시각은 자연히 테러 피해국에 대한 애도와 심정적 지지/물질적 지지로 이어진다. 더구나, 요즘처럼 反戰/反테러의 분위기가 국제 여론화되어 가고 있는 시대에서 테러리즘은, 그 무차별성 탓에 1차적 테러리즘의 피해 국가가 제3국들을 反테러리즘 전선에 동참시키기가 쉽고, 그들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던 강대국 내부의 지식인 계층의 목소리를 작게 만든다. 그러한 국제 정세의 흐름은 테러리스트(물론, 그들 약자/소수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은 마치 무장 독립 투쟁가처럼 비춰질 것이다.)들에게 조금도 유리할 것이 없는, 그들이 최초 목적했던 것조차도 얻을 수 없는 절대적 고립 상태로 몰아 간다.

[마드리드 열차 테러 당시 사진]


테러리즘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급진적이고 과격한 선택 수단'이다. 테러리즘은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약자들의 선택 수단이고, 그러한 이유에서 테러리스트들은 강대국들의 군사력과 충돌할 수 없는 구조적인 취약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1998년 오사마 빈 라덴의 美구축함 테러는 실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러한 구조적 제약 속에서 테러리즘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상대적으로 유약하고 방어가 취약한 민간 시설을 표적으로 삼을 수 밖에 없으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민간 시설에 대한 타겟팅이 테러리즘이 추구하는 공포에 의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목표를 강제하기에 최적화될 수 표적이라는데 또다시 역설적인 그 문제점이 있다.

테러의 표적으로서 민간 시설을 선택하게 되면 단번에 엄청난 국내적, 국제적 관심을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혼란 속에서 그들은 그들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극대화된 상태에서 전달할 수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테러리즘을 시도하는 조직들은 민간을 목표로 한 '손쉬운 테러'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민간을 향한 테러 행위는 크게 전달되는 그 메시지만큼 더 큰 비난과 보복의 불씨를 낳게 된다. 여기서 또 한 번 힘으로 정의된 국제 사회의 논리가 등장한다. 강자의 테러리즘과 약자의 테러리즘은 제3자의 입장에서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강자의 폭력은 '일종의 정의를 실현하는 강제력/거스를 수 없는 대세' 등으로 인식하며 주변 국가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국가를 지지하는 반면, 약자의 폭력은 '국제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제거되어야 할 불필요한 폭력'쯤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왜 발생했으며 원초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으며 그러한 요구가 합리적이고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제3국의 대부분의 일반 대중으로서는 애초에 그리 가치 있는 것도,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다.

단지, 그들이 비정상적이고 비정규전적이며 무차별적인 테러 행위를 자행하는 것 자체에 공포와 분노를 느낄 뿐이다. 즉, 설사 그들의 요구가 옳다고 하여도 그것을 지지할 의사를 그들 스스로 거세시키는 꼴이다. 그들 무장 테러조직들이 국제적으로 극소수인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계층과 자국 내의 선동적인 민중들의 지지를 얻는 것 정도로 만족한다면 그러한 테러 행위가 자신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과거 우리의 항일독립 운동가들이 그랬듯이 그러한 형태의 독립 운동처럼 우리의 과거 무장독립 운동가들이 많은 피를 흘렸지만 결국 무가치한 죽음, 자기만족적 순교만 남기고서 최종적으로 얻어낸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또다른 강대국의 힘에 의해서(우리가 의도한 힘도 아닌) 타의적으로 해방이 되는 그런 비참한 상황이 재현될 것이다.

설사 테러행위로 인한 민중들의 공포를 유도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시도했다 하여도, 아둔한 나라 '필리핀'과 같은 모습은 또다시 재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테러리즘에 한 번 굴복하게 되면 2차, 3차의 유사한 형태의 테러리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며 그러한 형태의 손쉬운 정책 변환은 해당 국가와 정부가 자국 내에서는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국제화/세계화 사회에서 제3국의 신뢰를 받기 힘들게 만든다.

[간디의 투쟁법은 그 진척이 더디고 불명확했지만, 결과적으로 국제 정세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가장 평화적이고 온건하며 국제적인 지지를 포용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게 하였다. 그러한 그의 투쟁법은 오늘날도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존경 받는다. 하지만, 지하드를 외치는 알 카에다를 존경하는 이는 거의 없다.]


약자는 강자와 다르다. 약자가 강자처럼 문제를 해결하고 요구를 관철시키고자 한다면 약자는 강자의 더욱 거대하고 무자비하며 맹렬한 보복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한 소수의 급진주의자들의 무지와 방종에서 비롯된 폭력은 다수의 그들이 소속된 사회에 강자로 인한 고통만을 선사할 뿐이다. 그것이 세상의 논리이며 유사 이래로 지금까지 그러한 양상은 그 형태만 다르게 나타났을 뿐, 계속 반복되어 왔다.
[2차 대전에서 레지스탕스가 발생한 도시에는 히틀러의 SS친위대가 파견되어 마을을 몰살시켰고, 팔레스타인계 테러가 자행되면 이스라엘군의 보복 공격이 가해졌으며, 알 카에다의 영웅주의에 젖은 무력 도발인 9.11테러의 댓가는 아프가니스탄 민중들과 이라크 민중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막연히 미국과 이스라엘 등만 탓을 할 것이 아니다.]


관련글과 상단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약자가 내세울 수 있는 폭력과 테러리즘이라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들이 물리적으로 나약한 채로 물리적 해결을 시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그렇다면 약자는 어떠한 방법이 동원하여야 하는가?


우리는 이미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60년도 더 전에 명확히 알게 되었다.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저항에 대해 가장 모범적인 대안을 제시한 예가 바로 '마하트라 간디'의 경우다. 구미위원회의 이승만 같은 경우는 무력이 아닌 외교적인 해결을 시도한 점은 긍정적이지만, 민중의 참여가 배제된 것이 약자의 입장에서 그리 효과적인 선택이라 보여지지 않는다. 반면 간디의 경우는 보다 낮은 레벨의 저항이었지만, 민중의 지지와 동반 행동을 유도하는 아주 효율적이면서도 평화적인, 동시에 심증적으로 약자의 편에 서려는 경향이 있는 국제 여론(강대국의 여론)으로부터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모범적인 모습이었다.

사빠띠스따 해방군의 마르꼬스의 경우도 매우 긍정적인 사례이다. 체 게바라와 곧잘 비교되기도 하는 마르꼬스는 체 게바라가 결국은 공산주의적 무장 쿠데타 세력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낼 수 없는 한계를 지닌 반면, 마르꼬스는 무장 게릴라의 한계를 자각하고 스스로 총을 버리고 펜을 든, 약자가 힘으로 무언가를 쟁취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상당히 빨리 깨닫고 10여 년간의 대외 저작 활동과 언론 활동으로 무장 게릴라라는 태생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제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 마르꼬스의 사빠띠스따 해방군은 알 카에다나 많은 이슬람 무장 테러 세력들 중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한 국제적인 지지와 호응을 받고 있다. [아라파트의 경우도 그와 큰 틀에서 유사한 노선의 변화를 보였다.]


달라이 라마의 투쟁도 매우 효과적이다. 티베트에서 인도로 망명한 이후의 그의 수많은 저작 활동(비록 그 책이 모두 비슷비슷하게 다분히 지루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과 언론을 통한 독립 활동은 지금 이 순간도 그를 세계의 聖人으로서 추앙 받게 하고 있고, 티베트 독립을 위한 무수히 많은 INGO 단체들의 활동은 지금 이 순간도 활발하다.

물론, 달라이 라마의 투쟁은 미국의 對중국 압박 수단의 일환으로서 유효한 탓에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그것이 실질적이든, 중국을 향한 압박 카드이든지 간에..)이 있어서 더욱 탄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오늘날 티베트 문제에 있어서 중국이 결코 과거와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명명백백하며 지금 이 순간도 중국은 티베트에 대한 고도의 자치권 인정 요구 압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우리의 식민지 시절에는 그런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 사회적인 풍조(제국주의)가 다소 차이점을 보인다.]


런던 테러 이후, 다시 한 번 알 카에다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전세계 언론의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보이는 관심은 그들의 목소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잔악한 테러 행위와 그 피해에 대한 관심이다. 그러한 그들의 테러 행위는 스스로를 더더욱 벗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뜨리고 있음을 그들은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강자의 테러리즘과 약자의 테러리즘은 명백히 다르게 정의된다. 어떠한 숭고한 정신과 순결한 정의를 지향한다고 하여도 테러리즘이 자행되는 순간, 그들의 이상과 가치는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받을 수 없는 추잡하고 더러운 가치로 전락한다.
약자는 약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닌 불리한 조건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불리한 조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제한된 카드, 불리한 조건이기에 활용될 수 있는 카드가 어떠한 것이 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강자의 힘에 맞서는 약자의 힘은 강자의 더욱 큰 분노와 응징만을 초래할 뿐이며 그 고통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 테러리즘의 순환 속에서 더욱 더 고통 받고 힘들어지는 것은 그들 자신 뿐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어떻게 해도 욕먹을 수 밖에 없는 역할

오늘 오전에 지난 토요일에 주문한 CD가 다시 한다발 왔다.
재즈 음악씬도 장사가 많이 안되는지,Masterpiece 시리즈로 앨범이 나오길래, 그 시리즈 전부와 의전행사처럼 예의상(?) 구매해 주는 Dream Theater의 신보와 그들의 서브 밴드 James Labrie의 신보를 같이 구매했다.

Jazz Masterpiece 시리즈야 Stanley Clarke의 앨범 등 아직 MP3로도 못들어본 앨범이 있어서 뭐라 말하기 그렇고.. [지금 CD로 처음 듣고 있다.]


Dream Theater CD를 열어 보니, 안에 해설지가 있다.
Dream Theater 같은 밴드의 바이오그래피를 못 '외울' 수준의 리스너는 아니기 때문에 애초에 읽지도 않았지만, 이런 메이저급 밴드에 속지가 있다는 것이 다소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좋게 써도 욕먹고, 나쁘게 써도 욕먹는 역할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만약 Dream Theater의 신보 속지에서 과거의 속지들처럼 '찬양 일색'으로 글을 휘갈겨 놓았다면, 나처럼 꼴에 주제파악 못하고 좀 안다는 양반들은 그 글을 쓴 사람에게 "지 꼴리는대로 휘갈겼구나."하고 그 글을 쓴 사람의 음악적인 역량을 의심함과 동시에 '돈벌기 힘들구나'하는 자조적인 쓴웃음을 지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Dream Theater 같은 메이저 밴드의 신보가 정말 쓰레기급으로 나와서 정말 험담을 늘어 놓았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아무 개념없이 단지 그들이라는 아이콘만을 추종하는 레벨 낮은 해당 밴드의 빠돌이들이 위의 경우와 비슷한 소리를 하면서 마구 비난해댈 것이다. [ex) Limp Bizkit, Korn, etc. 같은 빠돌이 많은 밴드들]


락음악을 듣는 사람들 중 소위 락음악에 '입문'한지 얼마되지 않는 사람들 다수는 상당히 강한 '선민의식'이 있다.
'나는 음악적으로 선택 받았다, 매니지먼트의 돈GR(알아서 해석바람.) 눈속임으로부터 구원 받았다.'는 식의 '선택된 리스너'라는 앞뒤 안맞는 의식이 그 정체다. 나 또한 락키드 시절에 그런 의식이 없었다고 결코 확언할 수 없다. 나 또한 그런 선민의식 속에서 과거 내가 구입했던 Michael Jackson의 피의 춤판(Blood On The Dance Floor)같은 CD들을 쓰레기 취급하며 중고로 팔아 버렸으니까.. [그래도 당시 시세로 받을 만큼 받았다. 내가 싫어도 누군가는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 언제나 상대적 측면을 노린다.]

이런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기간에는 필연적으로 '자신을 구원해준 밴드?[요즘 락키드들의 표현 방법을 빌리자면 자신을 락의 바다(?)에 빠지게 해준 밴드/요즘 락키드는 인터넷 탓인지 오프라인 시절을 경험한 나와는 표현방법이 많이 다르더라.]'가 있기 마련이고, 그 밴드 또는 그 밴드와 유사한 성향의 밴드에 대해서는 무비판적인 우호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Dream Theater를 처음 듣고서 일부 평론가(박은석씨 같은 사람들은 Dream Theater에 대한 이러한 입장을 강하게 부정한다.)들이 규정한 Progressive Metal이라는 이름에 도취되어, 원조라 할 수 있는 '6-70년대의 Progressive Rock'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고서 'Progressive'라는 용어의 기준점을 Dream Theater로 잡아 버린다.
이런 고정 관념은 Dream Theater의 음악이 어떻게 변화해도 '그들이 하는 것은 Progressive음악이다'라는 일종의 기준점이 되어 버리고, 그들과 유사한 음악을 하면 '아류 밴드' 또는 'Progressive Metal' 밴드로 인식하는 것이다.
[정말 많은 숫자의 Progressive Rock 밴드을 들어 왔지만, 난 여전히 Progresssive라는 표현을 입에 담기가 부담스러운데, 그들(DT의 애호가들)은 잘도 그런 표현을 입에 담는다. 정말 Progressvie 음악의 의미를 이해한 것일까?]

이렇게 북극성처럼 어떤 한 방면의 '절대좌표'가 되어 버린 밴드(소위 엄청난 인기를 몰고 다니는 '빅 밴드')에 대한 어떠한 세력의 흠집내기도 그들 락키드들에게는 용인되지 않는다. 나처럼 일반인이 내 블로그에서 Dream Theater에 대해 'Progressive라는 용어를 쓸 자격이 없다'라는 말에도 그들은 발끈해서 빈정(?)거리고 떠났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려다가, 우회적으로 씹어줬다.] 락음악 사이트에 가면 음악적인 소재를 가지고 정말 의미없는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경우를 곧잘 볼 수 있다. 그런 갈등의 대부분은 정말 의미 없는 내용에 대한 아집의 충돌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들 락키드(그들 스스로가 무차별적으로 비난하는 '빠순이'들과 자신들이 무엇이 다른가? 락음악을 좋아하면 빠순이짓에 면죄부가 붙는 것인가? 그래도 빠순이들은 CD를 산다. 자기들이 빠짓하는 밴드에 해당하는 사항이지만..)들의 눈치가 싫어서 덮어놓고 그 밴드를 찬양만 하고 있기에는 그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의 눈치가 싫다. 어느 한 분야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밴드의 라이센스반에서 해설지를 쓴다는 것은 그런 역할이다.
[예전에 Hot Music의 김봉환씨가 멜로딕 메틀 쪽 락키드들이 좋아하는 앨범의 속지를 여러 차례 쓰면서 락키드들의 꼬투리를 잡힐 만한 글을 많이 써서 무척이나 씹힌 전례가 있다. - 솔직히 내가 봐도 일부 엉터리가 있었다. ex. Pain of Salvation]

이번에 속지에 석영준씨가 장장(?) 4페이지에 걸쳐서 해설지를 썼네. 대충 훑어 보니, 역시나 소설을 써놓았구나. 물론, 아트락 앨범 해설지에 글을 쓰는 양반들의 철학적(?) 창작 소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해 할 수 없는 비극과 용서 할 수 없는 악(惡)에 맞추어져 있다' 같은 문장이 음악 해설지에서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속칭 진보 이념의 정치학 서적이라도 쓸 심산인가? = =..)


여튼, 무슨 짓을 해도 욕먹을 수 밖에 없는 역할.
소위 유명인을 평가하는 자리가 아닌가..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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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日 상호 불신

'작계5029(북한 유사시-정변발생-데프콘3 발령과 관련)'와 관련해서 韓-美간의 갈등을 핑계로 일본이 협력을 거부하고 있다.
작계5029에 대해서 한국이 협력을 거부한 것은 북한 정변 발생시 데프콘3가 발령되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자동으로 미국으로 이양되는 것 때문에 이에 부담을 느낀 한국의 거부가 '작계5029'의 사실상의 마비로 이어진 것이고, 이에 대한 韓-美간의 반목이 일본에게도 핑계거리가 된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작계5029'을 둘러싼 韓-美갈등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 전쟁 당시 UN군(사상자의 절대 다수는 한국군이었으나, 전력의 절대적인 부분은 UN군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중 95%이상이 미국군이고 전비의 99%를 미국이 부담했고, 전쟁 초기 상황에서 한국군의 전투력은 거의 무능력한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는 군인들만 투입되고, 미국의 장비가 대신 싸운 것과 다름없고 본다.)이 한국에 급거 파병되면서 사실상 작전수행능력이 전혀 없는 무능력한 군대였던 한국군은 그 군사 전략의 신속성과 조속한 북진 통일에 전력 협력한다는 의도로 작전지휘권을 UN군에게 이양한다. 이때만 해도 한국군의 작전 능력이란 것이 UN군의 지원 없이는 사실상 없는 것과 똑같았기 때문에 지휘권을 넘기지 않아도 UN군의 명령에 호응하지 않고서는 작전 수행이 가능하지 않았기에 이는 큰 무리없이 이양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작전지휘권이 한국군으로 다시 이양되어야 마땅하지만, 한국전쟁이 '종전'이 아닌, '휴전'이 되면서 지금도 남북간 경계선은 '국경선'이 아니라, '휴전선'으로서 한반도가 전쟁 수행중인 국가임을 명확히 함으로서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이 한국군으로 이양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병력을 70여만명으로까지 확대한 이승만 정부와 한국군 현대화에 많은 원조를 쏟아 부은 미국 덕분에 한국군은 한국전쟁 당시의 초라함은 벗어날 수 있었지만, 작전 지휘권이라는 치명타는 여전히 韓美연합사령부에 이양된 채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
[10여년 전에 협상을 통해서 평시 작전지휘권은 이양 받았으나, 평시 작전지휘권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군사작전(?)은 태풍오면 수로 작업하고, 쓰러진 벼를 세우는 정도(?)의 대민지원에 불과하다. 평상시 우리 군의 주적은 태풍(태풍 '매미'때 한국군의 활약상이 빛났다!)과 수해, 폭설이다.]


'작계 5029'에 대한 한국 정부의 부담감
이런 상황 속에서 美가 제의한 '작계5029'는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과거와 같은 臣民的 國民이 아닌, 민주적 각성이 충분히 이루어진 21C의 한국에서 과거와 같이 손쉽게 작전 지휘권을 美에 이양하는 이 같은 작전계획에 동의하게 될 경우, 정치적 후폭풍이 우려되는 상황이었고, 미국이 저지르는 일(?)에 한국이 전적으로 뒷치닥거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작계 5029에 대한 거부감을 더욱 증폭시키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한국만의 생각일 뿐, 미국과 일본의 입장에서는 한국은 여전히 그들의 협력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고, 동북아의 지정학적 특성과 한국이 구사할 수 있는 전략적인 한계(ex.핵전략 구사의 無用論)로 인해, 그것은 영구히 고착화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특히, 대북 정보의 99% 가까이를 美502정보여단에 의지하고 있는 한국군의 특성상 美의 지원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의 항명(?)은 그들에게는 대단히 불쾌한 도발 행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일부 급진적 사고의 사람들은 자주 국방을 부르짖지만, 502정보여단이 가진 조기 경보기와 U2기 등의 정보력을 자력 운영하려면 아마도 당신들은 앞으로 십수년간 지금 내고 있는 세금의 2~3배는 더 낼 각오를 해야할 것이다. 현실은 명백히 현실이다. 대안 없는 현실 부정은 어린 애의 반찬투정일 뿐이다.


왜 이런 상황에 봉착해 있는가?
더도 덜도 없이 한국 정부의 무능함에서 기인한다. 휴전 55년이 지나고, 미-소 냉전이 끝난지 15년이 넘은 이 시간까지도 작전지휘권을 되돌려 받지 못한 한국 정부의 무능력함과 '외교정책에 대한 일관성 결여', 낭만론에 젖은 무제한적인 '대북 퍼주기 정책'(그들은 그것을 햇볕정책이라고 부르나, 햇볕도 사람을 봐가면서 내려쬐어야 된다. 김정일은 개념이 없는 놈이다.) 등이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대북 퍼주기 정책은 현재의 강경한 입장의 부시 행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대북압박정책과 완전히 상이한 것으로서 韓-美간의 대북정책 공조에 지극히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미 빌 클린턴 행정부와 대표적 '낭만파' DJ정부는 휴전 이후 최초로 북한과 충격적인 화해와 상생의 정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대북 공습(Air Strike) 실행 직전까지 갔었던 미국 측에서 단신으로 북한에 뛰어든 '땅콩농장 주인' 출신의 지미 카터 특사(前美대통령)의 김일성 주석과의 담판이라는 영웅적인 활약은 단기적으로는 제네바 핵협정(KEDO, 연간 중유 50만톤 지원 등 약조) 장기적으로는 전세계가 놀란 김대중-김정일 독대라는 충격적이고 전향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4자회담 실패 등으로 결국 모두 뻥카가 된다.]

하지만, 북한은 이러한 평화와 공조의 길을 거부하고 다시 고농축 우라늄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불신'을 내세우며 그들을 '악의축(Axis Of Evil)'로 규정하였고, 응징의 대상으로 규정하며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햇볕정책의 잔향에 젖어 북한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 속에서 民族愛를 과시(?)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韓-美 공조를 스스로 깨어내고 있다.


이것이 과연 우리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벼랑끝 외교'라는 신외교어를 만들어낸 북한의 핵외교는 전세계, 특히 동북아의 지역 안정에 대단히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북한의 핵위협은 다양한 분석이 내려지고 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북한의 핵은 北-美 관계 개선을 통한 북한의 체제 존속을 위한 카드라는 해석에 동의한다. 북한이 진정으로 대외적 위협을 목적으로 한다면 1차 핵위기에서 이미 칼을 뽑아들었어야 할 것이고, 설사 현재의 핵위협에서 진정으로 대외적 위협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벌써 핵실험을 실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핵실험을 주저하고 있고, 미국에게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할 것을 묵시적으로 기다리며 동북아(한국, 일본)를 향해 위협을 가하고 있다.

북한이 어떠한 상황을 목적으로 하든지 간에 북한의 핵무장은 그 자체로 일본, 한국, 대만 등에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구실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전체적으로 美, 中, 러의 핵의 패권적 기득권을 무너뜨릴 소지가 있고, 전세계적으로 볼 때 美주도의 핵의 수평적/수직적 확산 방지와 어떠한 형태의 핵실험도 거부하고 있는 국제 조약 NPT와 CTBT의 붕괴를 초래할 것임은 불을 보든 뻔하다. 이러한 후폭풍은 한국이라는(설령 그것이 미국이라 하여도) 한 국가가 감당해낼 수 있는 소지의 것이 아니다. [미국은 이미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전세계적으로 떠돌고 있는 핵물질과 핵물리학자의 유출을 자국 혼자서 감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파키스탄과 북한의 핵무장, 중국의 ICBM기술의 급성장 등으로 경험적으로 체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동북아의 안정, 더 나아가 전세계적인 핵공포로부터의 평화를 위해서 美,日,中,韓,러시아 등이 협력하여 1991년 남북이 함께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선언'의 유지를 북한에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동북아 공조 실패와 불신, 그것이 문제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韓-日간의 불신의 핑계로 韓-美간의 불신이 제기될 만큼 동북아 국가들 간의 상호 협력의 신뢰에 금이 간 상태다. 이러한 상황은 누가 만든 것인가? 나의 대답은 노무현이다.

그의 DJ의 '퍼주기 외교'의 잔향에 젖은 채 행해지고 있는 2차 남북정상회담 임기내 개최를 통한 정치적 반전을 노리는 My Way식 대북 정책은 美 주도의 세계적인 대북 정책의 전략적 기조인 대북 압박을 통한 6자 회담의 조속한 재개와 대북 협상력 강화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남북차관급 회담에서도 한국은 북한에 비료 20만톤을 제공하면서 얻어낸 것이라고는 정확한 기약이 없는 '장관급 회담 개최 노력 약속'이라는 뜬구름 뿐이다. (이딴 식의 외교는 코흘리개 어린애도 한다. 이런 수준의 결과물을 가져와서는 개념없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희색이 만연하다.) 이외에도 엄청난 규모의 현금을 가져다 바치고 있는 금강산 관광 지속과 이제는 뉴스조차 나오지 않고 있는 식량 지원 등은 美 주도에 전세계가 공조하고 있는 대북압박을 통한 협상력 강화에 反하는 행위 이외의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거망동'의 결과는 점점 군사안보적으로 고립되어 가는 동북아에서의 한국의 지위와 협력 부재로 이어지고 있다. 자주국방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할 때, 韓美日 공조 없이는 한국의 운명을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데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편이 되어줄 수 있는 국가들 간의 불신 증폭은 우리에게 아무런 득이 될 수 없다. 미국에 의지하는 것을 非自主的이라고 비난하는 세력에게 과연 미국과의 공조 협력 없이 우리 스스로 中日과 대립해서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지 되묻고 싶다. 무엇보다 미국도 中-日간의 조정자가 되지 못하는 동북아에서 한국이 어떻게 동북아의 조정자(Balancer)가 될 수 있다고 믿는가? 결국은 동북아 국가 모두가 뛰어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동북아의 특수한 정치적, 군사적, 역사적 배경은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느 한 국가의 영웅적 행동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외교는 십자군적 마인드로 행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한민족의 국가라고 하여도 그 국가와 우리가 민족의 운명을 두고 결전도 불사했던 마당에,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의 방사포가 서울 한복판을 향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향한 피드백이 없는 무책임한 지원은 우리의 목줄을 죄는 것 이외의 결과가 될 수 없을 것이다.



P.S. : 이미지 좀 붙여 보려고 사진을 찾는데, 고이즈미를 검색어로 치니까, 고이즈미 사진보다 원숭이 사진이 더 많이 나왔다. = =.. 고이즈미 저 사진은 고1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랑 많이 닮았네. 머리만 좀 더 까지면..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Goodbye Lenin

뒤늦게 굿바이 레닌을 봤다.
동독 출신 청년의 효심(?)을 주제로 잡을 수도 있지만, 나는 역시 아무래도 독일 통일과 냉전의 종식이라는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래 캡쳐들은 모두 영화의 장면임.]

[독일의 통일은 1967년부터 시작된 서독의 치밀한 동방정책과 RFE(Radio Free Europe) 등을 통한 언론의 자유로운 유입 등이 장벽 넘어 살고 있던 동독일인들에게 사회주의의 허상을 깨닫게 하였다. 오늘날 정경분리의 원칙 아래, 무작정 퍼주기를 하고 있는 한국의 햇볕정책과는 그 괘를 달리 한다.]

영화 속 세계는 물론 아주 온건하다. 현실은 분명 영화 속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거칠었을 것이다. 주인공인 청년은 대단히 서구화된 마인드를 가진 청년이다. 그런 탓인지 통일 이후에도 곧바로 서독 지역의 회사에 취직하는 등 매우 성공적인 적응기를 거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현실은 대단히 달랐을 것이다. 현재 통계상으로만 동독 지역의 평균 실업률은 20%를 상회하고 있고, 이는 통일에 대한 불만과 과거에 대한 회귀 욕구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NPD(新나치 계열의 NPD(National 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독일국가민주당)같은 초강경극렬우익분자들이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최근 총선에서 12% 지지 획득이라는 충격적인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이들 新나치즘은 과거 전통적 나치즘보다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인종 정책으로 모든 유색 인종과 유태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으며 WTO와 세계화(Globalization)에 반대하고 있다. - 물론, 이러한 정책들은 현실적으로 반영이 불가능하다. 나는 지금도 한국의 WTO반대 세력들이 속칭 '빨갱이/용공분자'처럼 보인다. 그들은 일개 국가의 힘으로(심지어 미국조차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WTO에 반대하면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갈등만 조장시킨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단기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23년간의 서독 정부의 노력과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던 동독 정부의 협조, 여기에 '호네커'라고 하는 전향적인 정치 지도자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신기능주의는 모든 면에서 기능주의와 동일하지만, 이러한 '정치 지도자의 결단'이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기능주의의 약점을 보완하였다. 하지만, 김정일 왕조에게서는 결코 이런 전향적인 정치적 결단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상으로 보면 동독 지역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는 것이 잠깐 나온다. 그 해는 이미 89년이었고, 주인공 청년도 민주화 시위에 동참했다가 열성당원인 어머니께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된다.
이 장면은 물론 현실과 같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독 지역에서 집회가 이뤄질 만큼 사회가 상대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엿볼 수 있다.

반면 북한에게서 과연 이러한 인민 집회를 기대할 수 있을까 반문해 보게 된다. 그것보다 북한 인민이 민주주의라는 용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 하는 기초적인 질문에서부터 이미 회의가 든다. 한반도에서 민주주의가 도래한 것은 민(民)을 불쌍하고 무지한 자식쯤으로 여기고, 어버이의 마음으로 다스리고자 했던 조선도, 신민(臣民)이었던 대한 제국도, 일제 강점기도 아닌, 이승만의 남한, 좀 더 실질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면 1987년 6.29선언이 선언된 6공화국부터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카리스마의 정치인 1공화국과 민주적 역량도 없이 분노만 표출할 줄 알았던 중우(衆愚)의 무능력함이 극도로 드러난 2공화국을 감히 민주주의라 부를 수 없다.]북한 지역에는 단 한 번도 제한적인 민주주의조차 도래한 적이 없다.

[철거되는 레닌의 동상. 레닌의 철거는 맑스, 엥겔스와는 다른 관점에서 세계체제의 관점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설파한 세계공산주의혁명이론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북한 땅에서 과연 김일성의 동상이 녹여져 이순신의 동상으로 바뀔 날은 올 것인가?]

정치 이론가들은 이미 북한을 사회주의 계열의 정권으로 보지 않는다. 북한에 세워진 김씨 왕조는 72년 新헌법 개정부터 '주체사상'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사회주의 노선(맑스/레닌주의)과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며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다져 갔다. 그의 존재는 이미 북한 내에서는 맑스/레닌 그 이상의 존재이며 종교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그가 80년대 남북 경제역전 이후부터 국제정치적으로 남한에게 상대적으로 위축되면서 실시한 철저한 폐쇄정책은 오늘날 통일의 기반 자체를 붕괴시켜 놓았다. 이미 민족간의 전쟁과 숱한 협정 위반과 도발 행위 등으로 불신감은 극에 달한 양국 관계에서 대화의 단절은 민족의 양분으로 이어져 나와 같은 통일반대론자들의 주장이 만만찮은 세력을 과시하고 있을 지경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의사로서 서독 지역에 학술회의 참가차 갔다가 그대로 망명해 버리게 된다. 물론 현실에서는 좀 다른 모습이겠지만, 일반적인 학자 그룹들의 학술 교류도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알 수 있다.
의사와 같은 계급은 상대적으로 사회 상류층 계급이다. 인민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외국과 접촉이 많은 인사들은 현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겉으로는 자유를 찾아서 왔다. 인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민주주의를 존경한다 그러지만, 결국 자신이 더 넉넉하고 가치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뿐이니까.. 난 가식적인 미사여구따위는 살인충동을 느낄만큼 질색이다.


* * * * * *



마지막 부분에 보면 주인공이 쏘아 올리는 로켓.
그거 내가 예전에 한국우주소년단 창단맴버로서 활동할 때 몇 번 쏘아 올렸던 기억이 난다. 건전지 만한 추진제를 로켓(종이원통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소재다.) 끝에 꽂아서 전기적인 접지 장치를 통해서 버튼을 누르면 쏘아올라지는 것인데, 실제로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높이 올라간다. [정말 높이 올라간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내부에 낙하산도 있어서 내려 오면서 로켓 머리 부분이 분리 되어서 낙하산을 타고 멋있게 내려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전량 수입품[미제였던 걸로 기억한다.]이었던 관계로 몇 번 쏘아보진 못했지만, 아주 재밌는 로켓이다.


* * * * * * *



[영화 장면 중 일부]


여기에 나오는 이 여자..
왠지 눈에 익어서 좀 자세히 봤는데, 2004년 베를린 영화제였던가.. 거기서 비영어권 영화 최우수상을 받은 '히틀러 : 제3제국의 몰락'이라는 영화에서 히틀러의 연설문을 타이핑해 주는 여자 보조원(극중 거의 실질적인 주인공으로서 등장한다.)과 동일 인물인 것 같다.
히틀러를 벌써 미치광이가 아닌, 인간으로 바라 보는 것을 용인해도 되는가에 대해서 상당한 반발을 샀다고 했으나, 그 영화에서 내가 느낀 히틀러에 대한 묘사는 클라우제비츠를 선택하면서도 패색이 짙어지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히스테릭에 빠진 인간의 모습 이상의 그것이 없었다.

그 정도의 묘사를 미화라고 매도한다면 그것을 매도라고 하는 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의 묘사인지 궁금하다. 자신들이 요구하는 시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단이 되고, 호전론자가 되어 버리는 그 시각은 마치 절대자에 충성하는 종교인들을 보는 듯하다. [실제로 복음주의 계열의 남부침례교가 성서 무오류설을 믿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뚜렷한 선악대결 구도(그리고 당신들의 선의 무조건적인 승리)인가? 이 세상에 완전한 선이 어딨는가? 승리했기에 선일 뿐인 것을 패배자에 대한 완전한 매도는 후세인에 대해서도 이뤄지지 않은 작업이다. 이슬람권에서는 몰락한 후세인조차도 감싸려 하고 있다. 인권과 평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오히려 피해망상에 젖은 듯이 더욱 갈등조장적으로 행동하지 않는지 반문하고 싶다.


- 글을 넣을 만한 카테고리가 마땅치 않군. 영화를 거의 안보기 때문에 영화 카테고리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대충 아무렇게나 집어 넣었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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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세계를 향한 일반적인 시각의 모순

아래의 내용은 선진국이나, 우리 스스로를 탓하거나, 책임을 묻는 의도가 아니다. 선진국과 우리들의 선택은 인간의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에 충실한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의 선택 상태이며 그것은 현재의 패러다임에서 결코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제 3세계 국가들은 특별한 예외 조항이 없는 한, 국제사회에서 비주류 국가들이다. AA(Asia, Africa)지역과 중남미, 중앙아시아, 중동아시아 등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러한 제 3세계에 포함된다. 그들은 국제사회와 UN 등의 국제기구, 국제 레짐에서 다수임에는 틀림없지만 철저한 비주류로서 살아간다. 그들 대부분은 극도로 가난하며 UN 보고서에 의하면 여전히 전세계 인구의 40%가 1일 소득 2달러 미만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제 3세계 국가로 갈수록 그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하며 이들 국가 내부적인 빈부 격차 또한 엄청나다.

[UN산하 세계식량계획(WFPWorld Food Programme)은 제 3세계 지역, 특히 아프리카 지역의 기아가 극심함을 매년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의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는 국가는 없다. 식량 지원은 단순히 식량 지원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운송과 임금, 유지비, 현지 물류창고 등 특정 국가의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이고도 명백한 문제가 상존한다. 그런 현실에서 인도주의적 차원의 지원이라는 명목만으로 막대한 비용을 기꺼이 감당할 국가는 지구상에 없다.]

브라질은 전체 인구의 49%가 2달러 이하의 하루 소득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은 BRICs라 지칭되는 신흥공업국가[Newly Industrializng Countries]의 일원이다. 이러한 다수 국민들의 경제적 빈곤 속에서 이들 제 3세계 국가들은 국제 사회에서 정상 국가로서 제대로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UN등의 국제 기구에서 이들은 서방 선진국들(이 중에는 한국도 당연히 포함된다.)에게 아무런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없는 하찮은 국가들 정도로 인식하고 있으며 UN총회의 득표 외교를 할 때만 몇 백만 달러 정도를 해당 국가의 국가 원수도 지도층에 전달하면 기꺼이 표를 살 수 있는 나라로 취급 받으며(또 실제로 그러한) 국제사회의 철저한 객체로서 존재할 뿐이다.

이런 사실들은 처음 알려진 사실이 아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이슈와 다큐멘터리, 정보 프로그램, 뉴스 속에서 쏟아져 나온 현실들이고, 이들 제 3세계 국가들이 요구하는 신국제경제질서[New International Economic Order]의 요구와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 [UNCTAD,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의 상설기관화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알려져 온 사실이다. UN인권보고서는 매년 제 3세계의 인권 실태를 보고하고 있고, 그들 극빈국들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과 지원을 촉구하고 있다. 이것은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과거 냉전 시기, 우리 나라가 UN에서 소련의 입은 빌린 북한의 요구가 UN총회에 상정되면 미국과 한국, 일본 등이 총회에 자유진영이 불리한 안건이 통과되지 않도록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절대다수의 표를 가진 제 3세계 국가들(77그룹)의 표를 얻기 위해 북한과 함께 추잡스러운 득표 외교를 펼친 바 있으며 가봉의 봉고 대통령과 같은 아프리카 UN표의 결집에 중요한 역할한 제 3세계 국가 원수 같은 경우는 남북한을 모두 오가며 실리 외교를 펼치며 양국가의 많은 지원을 받은 바 있다. 한국의 승합차로 한때 이름을 날린 '봉고' 승합차는 가봉의 봉고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일종의 외교적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 시절에는 소비에트 연방, 제 3세계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모택동의 중국, 공산 진영의 확대를 막기 위해서 對소련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이 펼쳐졌고 이를 바탕으로 공산화의 기미가 보이는 지역에 엄청난 경제적 지원 또는 군사적 압박이 가해졌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당시 신생독립국 신분이었던 AA각국들은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민주화와 자립경제를 세울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은 제공 받을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냉전의 시기에는 이데올로기의 그늘 아래 제 3세계 국가들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념의 대립이 선진강대국들에게 경제 논리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통해서 제3세계의 존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국제 사회는 WTO를 중심으로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를 넘어서는 세계화[Globalization]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물결이 지배하고 있다. 각국은 경쟁을 조장하고, 국제 사회는 관세 철폐와 시장 개방, 무한 경쟁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모 기업의 광고 카피처럼 '세계 초일류'만이 살아 남는 약육강식의 시대를 도래하게 만들였다. 이것은 이미 우리 삶의 뼛속 깊은 곳까지 자리 잡았고 말 그대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고용의 유동성을 확보한다는 이유로 노조 측이 주장하는 '고용 안정'이라는 주장은 구시대의 낡은 마인드로 치부되고 있고, 경쟁에 따른 사회 안전망의 구축이 시도되고 있으나, 재정이 없는 정부와 노동권과 생존권에 대한 의식이 부족한 기업들로 인해 진도는 한없이 지지부진하다. 여기에 엄청난 고용 창출 능력과 막대한 초기 투자 비용을 필요로 하는 굴뚝이 서는 공장은 점차 노동집약적이고 반환경적이며 저부가가치 산업으로 취급되어 후진국, 제3세계로 이전되고, 선진국들은 낮은 투자 비용으로 큰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IT산업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실업은 증가 가운데에도 제3세계를 향한 기술/자본 종속을 심화하여 그들의 가난을 고착화되게 만들고 있다. [더욱 아이러니는 그 결과로서 선진국의 하층민들도 제3세계 국민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 3세계의 문제'는 이처럼 개별 국가들의 문제(?)가 지구촌의 단위로 확장된 것이다. 경쟁이 심해질수록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 제 3세계는 계속 도태되고, 그들의 가난은 지속적으로 유지, 심화될 것이다. 비난 이러한 것은 경제의 격차 뿐만 아니라, 지식의 격차, 정보의 격차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더 이상 제 3세계 지역은 중국, 브라질, 인도 같은 몇몇 국가를 제외하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경제적 빈곤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고, 신국제경제질서 등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국제무역에서의 특혜와 서방 선진국들이 과거 미국의 서유럽부흥정책(Marshall Plan)과 같은 전폭적인 원조를 요구하고 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는 이미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자생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대륙 전토는 부족갈등, 인종갈등, 종교갈등으로 인한 내분으로 온전한 나라를 찾기가 더 힘들고, 군사 쿠테타, 패권정당을 통해 이뤄져지는 사실상의 독재체제, 뼛 속까지 썩은 지도층의 부패, 아직도 부족 사회가 지배하는 가운데 바닥을 치는 국민들의 정치사회화 수준과 낮은 교육 수준과 50~90%에 육박하는 문맹률, 모든 면에서 그들에게 밝은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을 향한 원조는 과연 적실성이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제기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이 드러난다. 지금은 국지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더이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세상도, 국가의 이익을 초월하는 초국가적인 기구나 레짐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다. WTO도 교토의정서도 결국은 특별한 부분을 제외하면 강대국과 선진국들에게 절대 유리한 조항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뿐이다. 더이상 경제 논리 이외의 별도의 목적을 위해서 제 3세계 후진국들을 무상 원조하고 지원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막말로 "내 나라 국민도 밥굶는 사람이 있는데, 남의 나라 국민 밥굶는 것에 우리 국민 세금을 왜 쓰냐?"라는 논리다. 절대 틀린 말이라 할 수 없다.

지구 공동체를 지향하는 학자들의 주장이나, 일부 리버럴 성향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제 3세계의 발전 없이는 서구 선진국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성장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아마도 나 뿐만 아니라, 특별히 경제학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말이 아주 틀렸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아직은 선진국들과 산업화에 성공한 국가들끼리의 교역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지금은 찢어지게 가난한 중남부 아프리카 국가들의 시장도 아쉬워질 날이 올 것이라는 점은 그 시기가 얼마나 먼 미래의 것이냐하는 것이 문제이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서방 선진국들의 값비싼 물건들을 살 수 있는 충분한 구매력을 갖춘다면 또다른 성장을 향한 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제 3세계 경제성장을 위해서 자신들에게 앞으로 원조를 위한 세금을 더 내라고 정책을 결정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국민적 반발을 초래할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맞는 말일지라도, 당장 나에게 피해가 오는 것을 꺼리는 인간의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사고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제 3세계에 대한 원조는 어디까지나 도박[우리는 이미 충분히 '스펀지 효과'를 경험하였다.]이고, 구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종속의 시작일런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그런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이 생존이라는 명제가 촌각에 달린 이들을 앞에 두고 공자의 윤리를 설파 하는 격이며 완전히 틀렸다고 확신한다.] 감정적으로는 그들을 동정하고 안타까워 하지만, 일반 국민 모두에게 나와 우리 국민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라고 한다면 손사래부터 치는 사람이 절대다수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도 미쳐 모르는 사이에 충분히 강자의 대열에 합류해 있다. 그리고 우리들 스스로도 우리보다 더한 강자의 억압에 분해하면서도 우리보다 더 약한 자들에게는 강자의 권위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길에서 미국인/프랑스인을 만났을 때와 방글라데시인/우간다인을 만났을 때, 과연 자신은 어떤 감정과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 것인가? 아마도 나와 유사한 감정과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절대 다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기주의자인가? 나의 생각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단지 우리들의 생활 수준에서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고에 묶여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선구자적으로 제 3세계에 은혜를 베풀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최고의 선진국(?)들이 나서지 않는데, Secondary Level에도 들어왔다고 보기 힘든 우리가 섣불리 성장에 발목을 잡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결론은 '선진국들이 어떻게 하는지 눈치를 살피자'인가? 아마도 이게 나의 결론인 듯하다. 동남아시아의 해일 피해에 서구 선진국들이 앞다투어 기부(Donation)러시를 한 것은 그들이 가진 천연자원의 채굴권과 시장성, 정치적 영향력 확대 등이 탐이 났을 뿐이지, 단순히 인류애적 차원에서 원조를 시도한다면 그런 천문학적인 규모의 원조가 이루어질 리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제3세계 극빈국들의 원조 요청에 개미 눈물만큼의 원조액을 제시하면서 선결 조건으로 부패척결을 제시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들이 정치 부패 지역의 대표적 지역 중 하나인 동남아에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선행(?)을 베풀 리 없다.
이익이 없는 곳에는 기업 뿐만 아니라, 국가도(국민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프리카 검은 대륙의 수단, 르완다, 알제리, 우간다, 브룬디, 챠드, 케냐, 앙골라, 자이레, 소말리아, 나이지리아 등 거의 아프리카 전토에서 분쟁과 가난, 기아에 허덕이고 있음에도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지 않은가.

[국제 사회는 얼음처럼 냉정하다. 이익이 없는 곳은 철저히 외면된다. 그들의 굶주림은 우리의 굶주림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히 외면될 수 있는 것이 국제 사회의 논리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신은 인간의 발원지로 아프리카를 택했을지 모르나, 오늘날의 신은 이미 아프리카를 버렸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제 3세계를 향한 우리들의 일반적인 시각의 행동없는 모순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인간 본성에 충실한 것일 뿐,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조선 말기 헤이그 특사가 서구 열강들 속에서 조선의 억울함을 호소할 때마다 동정과 위로를 전하면서도 아무도 떠오르는 강국이던 일본과의 충돌을 원치 않아, 현실적으로는 조선을 돕지 않던 상황과 같지 않은가.

* * * * * * *


MBC의 'W'라는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최극빈국 네팔의 이야기에 새삼스레(?) 시끄럽게 말이 많은 것을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어처구니 없는 것은 내용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거기 나오는 여자 옷차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하릴 없는 치들의 한심한 소일거리였겠지만..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 Favicon of http://blog.naver.com/ohaioho BlogIcon 조커 2005.11.12 01:11 ADDR 수정/삭제 답글

    그러고보면 Live 8은 절대로 성공할수 없는 이벤트였던것 같습니다. 선진국 지도자들을 설득해서 아프리카를 돕는다는 발상자체가 실현 불가능한 얘기죠.

    • Genesis™ 2005.11.12 02:05 수정/삭제

      이 글은 거의 1년 전에 쓴 글인데, 쓰고 교정이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아서 지금 읽어보니 많은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지금 약간 퇴고를 해서 수정을 하긴 했는데, 깊은 퇴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표현상에 문제가 다소 있습니다. 조커님이 옛날에 쓴 글을 자꾸 읽으시니 은근히 지금보다 지식이 얕았던 시기에 썼던 글들이 엉터리 얘기를 할까봐 신경이 쓰이네요. - -;;

      LIVE8은 결국 주최자 모씨가 한몫 단단히 챙긴 행사로 끝나 버렸죠. 호들갑은 떨었지만, 주최자 그 자신이 도덕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티스트(Artist)는 없다.

간밤에 친구 녀석과 방에 앉아서 DVD를 레코딩하면서 몇 가지 분야에서 긴 토론(?)을 하였다. 진보의 만용과 보수의 자학에 대한 논란, 한국 사회의 개혁광기(狂氣), 국가와 개인에 대한 논란 등.

그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예술'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흔히 음악인을 아티스트(Artist)라는 표현으로 높여 부르는 음악인(스스로를 그렇게 높여 부른다.)들과 그들의 애호가(스스로는 '팬', '매니아'라고 부른다. 나는 매니아, 팬이라는 표현을 경멸하기에 '애호가'라고 칭한다.)들은 그들의 피조물들에 대해서 '예술'이라는 표현을 붙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팬들은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예술성을 지칭하는 음악 세계에서 불리는 또 다른 이름인 '음악성'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과학적이지 못한 그들만의 주관을 통해서 그 음악의 '예술성'을 평가한다. [예를 들면 서태지의 자칭 '태지 매니아'들은 서태지를 문화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 서태지에 대한 나 개인적인 배신감과 사적 감정은 가급적 배제하고자 한다. 이미 서태지의 비열함에 대해서 수차례 언급했었다.]

우리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인류 최고의 미소라고 손쉽게 떠올린다. 나는 모나리자가 미인인지, 그녀의 웃음이 가장 아름다운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주류에 속한 소위 평론가들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며,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미소이며 예술이라고 격찬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는 인간의 남긴 가장 아름다운 예술 중 하나로 추앙 받는다. 그 작업 도중에 미켈란젤로가 목뼈가 부러졌다느니, 목 디스크가 와서 평생 고생을 했다느니 하면서 다양한 확인되지 않은 영웅담을 붙이며 그의 숭고한 종교적 믿음을 칭송하는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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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언제나 돈이 궁하다. 많은 락밴드에게 음악은 취미 활동인 경우가 많고, 공연 수입과 음악 외적인 직업에서 생활을 위한 재화를 벌어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메이저급 밴드나,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부류의 애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대형 스폰서를 등에 업고 큰 공연 한 번으로 목돈을 챙기거나, 대중의 말초적인 면을 자극하는 섹스어필과 영상과 공연으로 손쉽게 돈을 벌어 들이고, 그 재화를 자신들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서 기꺼이 소비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오늘날 대표적인 천재 화가로서 칭송 받는다. 재작년쯤, 한국에서도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열풍이 서점가를 휩쓴 적이 있으며, 나 또한 그 당시 빈센트 반 고흐의 확인되지 않은 자서전 한 권을 산 적이 있다. 그 자서전에서 빈센트 반 고흐는 한 번도 자신의 그림을 예술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팔고자 노력했다. 그는 몇 명의 매춘부를 사랑하였고 동거를 하면서 생활비를 위해 평생동안 재력가인 동생에게 의지하며 팔기 위한 그림을 그렸고, 그 덕분에(?) 몇 장의 완성본이 아닌 스케치 그림을 동정하는 마음을 가진 일부 인척들에게 팔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인간이 창조해낸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 하나로 평가 받는데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동양인의 시각에서도 놀랍도록 찬란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영화에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대성당 천장화를 그리기 위한 과정에서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미켈란젤로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종교적 일치감으로 인한 대승적 화해, 미켈란젤로의 숭고한 믿음과 천재성에 대해서 찬미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영화에서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와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에 대한 스케치 완성본을 들고서 전쟁터에서 전쟁을 수행중인 율리우스 2세에게 도안을 펼쳐 보이고,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서 천장화를 그리는데 대한 대금을 놓고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극적인 표현이라 예상되지만, 그만큼 미켈란젤로는 그 그림을 그리면서 큰 돈을 벌고자 하는데 집착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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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상업적이며 어디까지가 대중적인가? [많은 이들이 상업성과 대중성이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평소에 가졌던 이것에 대한 깊은 회의가 토론 과정에서 더욱 확고하게 다가왔다. 상업성과 예술성, 대중성을 평가하는 잣대는 결코 개인이 아니다. 개인의 평가는 그 자신과 일부 주변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며 대다수의 군중들에게는 미디어가 전달하는 소위 '전문가의 평론'에 의해서 좌지우지 된다. 개인의 평론은 그 글 속에 사회적 권위가 부족하다. 많은 이들은 전문가를 능가하는 음악적 이해나 포용력을 지닌 사람을 발견하여도 그가 자신이 익히 들어온 전문가 집단의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려 놓는 것을 꺼린다. 일개 개인의 평가에는 사회적인 권위가 함축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선 나부터 그림을 모른다. 또 미술 대학을 중심으로 미술의 세계도 지극히 위계화, 계층화 되어 있고, 서로가 저마다의 밥그릇을 나눠 놓고서 상대방의 밥그릇을 존중하며 자신의 밥그릇의 권위를 다른 권위적 집단으로부터 인정 받는다. 일반인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와 용어에 휘둘리며 그들의 해석에 대해 거부감과 동시에 권위를 느낀다. 만약 일반인 누군가가 '모나리자의 미소는 추악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하다'라고 비난한다면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하여도 그는 엄청난 반대와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권위를 가지지 못한 평론에 대한 다수 대중의 폄하이다.


그들이 말하는 '예술'이란 매우 애매모호하다. 대중은 흔히 예술성은 금전적인 것과 괴리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오늘날 자칭 아티스트라고 칭하는 그들 모두는 돈을 벌기 위해 그들의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그들 자칭/타칭 예술가들은 우리가 말하는 '상업적 측면'을 위해서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들은 그들의 작품을 팔기 위해서 활동했고, 팔지 못할 때는 끝없이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날 아티스트로 추앙 받는다.

서태지(내 안에서 그는 음악과 그를 좋아한 많은 이들의 배신자이며 스스로와의 약속조차 어긴 비겁자일 뿐이다.)가 졸지에 문화 대통령이라고 불리며, 일부 극렬팬들 속에서는 진정한 아티스트라고 추켜세워 진다. 서태지는 우리 나라에서 어느 누구보다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서 활동하였고, 많은 돈을 벌여 들였다. H.O.T./젝스키스/동방신기 모두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상업적 측면을 위해서 뛰어 들었다. 하지만, 대중과 소위 전문가들에 의해서 한 쪽은 아티스트로 추켜세워지고, 한 쪽은 장사꾼 취급을 받는다. (한 쪽은 먼저 시작했고, 다른 쪽은 나중에 시작했기 때문에?)


예술에 대한 대중과 전문가들의 견해는 일관성이 많이 떨어진다. 예술이라고 하는 비과학적이고, 극히 주관적인 잣대를 만들고서 저마다의 관점에 따라서 예술과 상품의 경계를 구분 짓는 현 상황에 묘한 불합리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왜 미켈란젤로는 예술가이지만, 이름 모를 화가의 길거리 액자 작품은 상품으로 취급 받는 것일까? 만약, 모나리자의 그림이 동일한 시대에 똑같은 그림으로 그려졌고, 만약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것을 모작한 것이라고 오늘날 갑자기 밝혀진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위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모나리자의 미소를 최고라 칭했던 많은 소위 전문가들은 어떤 주장을 할 것인가? 전쟁터에서조차 시스티나 대성당 그림의 가격을 흥정하느라 율리우스 2세와 갈등을 빚었던 미켈란젤로는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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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앉아서 예술의 경계를 구분하고자 노력해 보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적 권위가 없는 평범한 학생 두 명이 모여서 예술을 정의 내린다면 지금 한국에서 삐리하게 이렇게 평범한 학생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고, 벌써 미국의 무슨 사회과학연구소 등에서 스카웃해 갔을 것이다.

나름대로 예술가(Artist)는 아니어도 현대 사회에서 저작 활동을 통해서 추앙 받을 만한 인물을 선정하는 기준 하나를 정해 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수익 사업을 통해서 자신이 수익을 올리는 그 분야에 재투자하고 있는 자'로 한정 짓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자신이 여전히 그 분야에서 창작 활동을 해야 한다는 전제(창작 활동을 접고, 프로듀서나 매니저 등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제외)'를 다시 한 번 깔아 놓는다.

이 정도 틀이라면 최소한의 물(?)은 걸러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과거에 번 돈으로 프로듀서, 매니저 등의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포함시키기에는 그 명성을 미끼로 대중을 호도하는 좋지 않은 선례(서세원, 이수만, 양현석 등이 예라 생각한다.)가 너무나 많다는 판단 하에서 제외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 정도의 틀이라면 적어도 턱없이 '어린 재벌'들과 반짝 스타가 부각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한다.

결국 '예술'이라는 것은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예술은 말 그대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듯하다. 하지만, 한가지 내 안에서 분명해진 것은 아티스트(Artist)는 없다. 있다고 하여도 더이상 그들이 존경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EU의 통합

아래의 글은 2004년 5월 12일에 내가 예전의 내 블로그에서 쓴 글.

고로 본문의 모든 정보는 2004년 5월 12일이라는 특수한 시점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 시기 이후 EU는 EU헌법과 외무장관, 대통령직 등을 신설하며 European Union에서 European Federation(EF는 전적으로 내가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용어이며 공식적인 명칭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아는 바가 없다.)로 향하는 신기능주의적 발전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이 이 곳으로 옮겨지는 이유는 나중에 쓰려고 생각하는 글에 이 글이 필요해졌기 때문 + 2005년 1월 29일 이 블로그로 이전하면서 예전에 썼던 글 중에 빠뜨렸던 많은 글들 중 하나를 챙긴다는 의미 + 더불어 나의 버릇 중 하나인 내 글에 내가 트랙백 걸기(내가 외부에 트랙백을 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해봐야 문답놀이 정도?)를 내 블로그 안에서 자체 해결하기 위해서다.

앞으로 오랫동안 이 블로그를 내 홈페이지처럼 애용할 것이다. 홈페이지 같은 걸 만들 능력이 안되는지라, 그리고 이 태터툴즈가 왠지 정감이 있어서 방량객/나그네 기질이 강한 나로서도 여기에 오래 머물고 싶다. 나도 이제 화전민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민이 될 때도 됐지. [....;;;]


과거에 썼던 글을 다시 되돌아 보면 느낀 것은..
- 불과 1년전 글임에도 글이 좀 어눌한 면이 많이 눈에 띄는 점. [진짜 심각하게 느껴진다.]
- 세상 변하는게 참 빠르구나...하는 느낌.
- 이 글을 쓸 때와 지금의 견해가 일부 차이가 있다는 점. 이것은 새로 쓰려는 글에서 변화된 나의 시각을 적어볼 생각. (결국은 세상 변하는 속도만큼이나 나의 시각도 변하고 있다는 것인가?)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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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르완다 : 완전히 무고한 자


흔히들 전쟁/내전을 치르는 국가들의 안타까움을 지적하는 이들은 '정치인들의 권력 다툼에 애꿋은 국민들만 희생되고 있다'라는 말로서 그들의 죽음과 고통이 일부 소수의 권력욕 때문에 파생되는 무고한 희생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정치인들의 '권력욕'이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집단이 발생하고 국가라는 권위적 공동체가 파생된 이후부터 '정치인'이라는 집단은 합법적/비합법적으로 다수 대중들을 지배해 왔고, 그들의 필요와 민중의 요구에 의해서 그 권력을 행사했고, 이 땅의 역사를 쌓아 왔다. 정치인들의 권력욕은 인간의 탐욕스러움 즉, 시기심, 팽창욕, 소유욕 등을 대변하는 대표적 아이콘으로서 민중들의 존경의 대상보다는 미움과 증오의 대상으로서 人間史의 중요한 페이지들을 장식해온 것이 사실이다.

'권력욕'은 필연적으로 또다른 권력욕과의 충돌을 일으키게 되고, 그러한 충돌은 다양한 형태로 파생되어 나타나며 때때로, 그 중 가장 격렬한 형태의 충돌인 '전쟁'이라는 형태로 인간 세계에 표출이 된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유혈 사태를 초래하며 전쟁으로 인한 고통은 전쟁을 직접 수행하는 군대의 군인들, 무장 게릴라와 작전을 수행하는 지휘 계통에 소속된 엘리트 집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에게까지 그러한 전쟁의 고통이 파급된다. 전쟁은 발생 그 자체가 최대한으로 억제되어져야 하는 권력 충돌의 해결 방법이고, 전쟁을 영웅시하는 풍조 또한 사라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인간이 존재하고, 그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가 존재하며 그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정치 세력'이 있는 한, 전쟁은 결코 인간의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다. 나는 스탈린을 깊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전쟁 불가피론'이 세상을 직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전쟁(또는 무력 충돌)은 '최소화'될 수는 있지만, 이 땅에서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다. 인간의 문명이 변화해온 것처럼, 전쟁의 모습도 변화될 수는 있겠지만,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로 남는 이상, 전쟁이 이 땅에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들 중 하나가 전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가 반드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다. 이는 (신)현실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비판과도 일치한다.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의 '프로지움'이라는 약처럼 인간의 욕구를 억제하여 완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수 있게 만드는 약이 나타난다면 가능할지도?]


'호텔 르완다'를 보면서 감독 'Terry George'는 '최대한 많은 관객들이 그들(르완다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게 할 것'이라고 인터뷰를 하며 영화의 노선을 분명히 그었다. 그가 보내려는 '호텔 르완다'에서의 진정한 메시지는 2차 대전의 쉰들러리스트를 연상케 하는 호텔 매니저 '폴'의 영웅적인 인본주의/휴머니즘적인 활약도, 후투족 민병대의 80만명을 대량학살한 잔혹함에 대한 고발도, UN PKO(Peace-Keeping Operation)군의 무기력함도, 과거 유럽의 팽창주의가 만연하던 시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였던 르완다에 식민 모국 벨기에가 심어놓은 후투족과 투치족의 민족 갈등의 골도 아니다. 테리 조지가 진정으로 보내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서문에 언급이 된, 정치인들의 권력욕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에 갇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어떤 면에서 옳고, 어떤 면에서 옳지 못하다. 옳은 면은 모두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는 측면에서 생략하고 옳지 못한 면만을 지적하자면 원천적으로 그 고통 받는 국민들은 완전히 무죄일 수 없다는데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민은 무고하고, 정치인들의 권력욕 때문에 무고하게 희생되고 있다는 것은 틀렸다. 분쟁이 있음에 있어서 무고한 자는 있을 수 없다. 전쟁과 같은 극한의 갈등에 완전한 제3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언가 역사의 톱니 바퀴에서 자신들을 '순결한 방관자'로 이전시키기 위한 좌파 성향의 정치비평가들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적 사고를 가진 지식인들의 책임회피성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르완다 분쟁'이라는 특수한 분쟁이 가진 정치적 특징(1973년 국방장관이었던 하비아리마나 소장이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독재의 기틀을 만들었고, 1994년 4월 하비아리마나가 극우 후투 진영에 의해서 암살되므로서 촉발된 르완다 내전)을 무시하고서라도, 그러한 내전이 발생할 때까지 국민들은 그들의 정치적 소임을 다하였는가 하는 다소 억지스러울수도 있지만, 본질적이고도 원천적인 질문이 발생한다.

국민은 자신들의 정치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동시에 그들을 관리/감시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민주주의 평화론'과 '국민소득 5000달러 이상의 국가에서의 군사 쿠데타 불가론'는 논리는 이러한 국민의 의무가 성실히 수행될 수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주장이다.

그렇다면 국민소득 5000달러가 안되는 아시아-아프리카 빈국들의 내전과 군사 쿠데타, 전쟁 등에 대해서는 그러한 국민의 의무를 강요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충분히 가능한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테리 조지의 이러한 메시지는 어느 부분에서는 정당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전쟁/내전이 발생하도록 방조하고 그들의 대중주의(Populism)에 호도되어 선동된 채, 정치인들의 의도대로 손쉽게 움직인 후투족 민병대들(마치, 한국의 어느 집단을 떠오르게 한다.)은 분명한 전쟁의 주체 세력이며 동시에 전범들이다. 그들은 그러한 고위 정치인/군부의 정치적 야욕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反평화적인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그러나 테리 조지는 이러한 모든 대중의 정치에 대한 감시 책임을 외면 또는 가볍게 다룬 채, 사회 지도층의 정치놀음을 집중적으로 부각(특히, 뇌물에 의해서 이념도 지조도 없이 뒤흔들리는 후투족 장성과 장교들의 모습을 집중 부각시키며 '뇌물이 떨어졌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대사를 재차 반복하는 모습은 그러한 시도의 노골화다.)시키면서 그들에게 우회적 면죄부를 주도록 관객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사회적 인과 관계에서 사회 구성원 어느 일방에게 완전히 무죄가 인정되는 경우가 괴연 몇이나 될 것인가? 정치인들이 뇌물을 받았다면 그것이 단지 뇌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 쌍방만의 책임이 되는 것인가? 사회의 관심과 감시의 의무에 대한 요구는 완전히 묵살되어도 합당한 것인가? 당시에는 억압적인 사회 구조 때문에 지적하기가 힘들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대폭 개방된 사회 구조 속에서 과거의 그들에 대한 비난과 비판을 맹폭하면서 정의의 화신이 되어가는 그들은 또다른 의미에서 사회적 폭력의 행사자이며 시대의 흐름과 권력 이동에 대한 새로운 추종에 충실한 비겁자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거나, 전쟁은 전쟁이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전쟁을 최소화, 단기화 하는 것이 바로 '최대의 평화('완전한 평화'라는 단어는 나의 사전에는 없다.)'를 만드는 길이다. 그러한 면에서 테리 조지가 또하나의 가해자로 지목한 르완다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벨기에, 프랑스 그 외 UN과 국제 사회는 이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에게 보상을 하는 사태(?)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나약하고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관계 개선에 열을 올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파워게임이며 힘의 논리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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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분쟁, 그 철저한 힘의 논리

- 독도 문제의 발생
2004년 2월 24일, 駐韓일본대사 다카노 도시유키는 서울에서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주재국의 주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충격적 발언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이에 국내 극우 세력을 중심 여론이 촉발되어 다카노 도시유키에 대한 즉각적인 추방을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곧 여론의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다카노 도시유키는 여전히 서울에 남아 있다.

2005년 3월 16일, 일본 시마네현에서 대한민국의 실효적 지배가 미치고 있는 동해의 섬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명명하며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제정하는 조례안이 정식으로 현의회를 통과하였다. 이에 거의 즉각적으로 한국 정부에서는 '新對日외교 독트린'을 발표하였고, 노무현은 대통령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연일 대일 강경 발언을 퍼붓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자민당내 일부 온건 파벌은 한국의 자중을 요구하고 있으나, 뚜껑이 열릴대로 열려버린 한국 측에서는 그 말이 귀에 들리지 않고 있다. 외교 관례를 무시한 일본이 주장하는 외교적 발언들은 적어도 한국내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연일 對日강경노선을 견지하고 있고, 소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채 분기탱천한 마산시의회는 '대마도의 날' 제정이라는 다소 유치한 발상까지 하게 되었다. 駐日대사관 앞에서 전국무술인연합회라는 낯선 단체의 회장 母子는 손가락을 절단하는 시위[이런 류의 시위는 정말 어리석고 우매하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바뀌는게 무엇인가? 자기만 손해일 뿐이다.]를 벌이며 잠시나마 큰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한국내의 反日감정은 87년 민주화 이후 최고조로 달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상응하여, 일본 내에서도 거의 관심이 없었던 동해 바다의 작은 섬 독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역사적 책임감이 결여된 채 50년을 살아온 일본인들은 한국의 反日감정에 대한 역풍으로서의 反韓감정이 그 불씨를 서서히 지피고 있다.


- 독도 문제의 역사적 전개 : 역사적 배경과 新한일어업협정
소비에트 연방 주도의 북방삼각동맹에 대한 대항의 의미로서 미국 주도의 이데올로기적 가치관이 반영된 남방삼각동맹을 위한 韓日수교가 맺어진 이후, 1965년 6월 韓日간의 어업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1998년, 국가 간 외교의 예의에서 있을 수 없는 국제법상 유효한 국가 간 협정의 '일방 파기'라는 무례한 외교적 수단을 내민 일본은 급작스럽게 韓日어업협정을 새로 체결할 것을 요구하였고, 한국의 어업협정 대표단의 대표는 "일본 측 대표와 동문수학하면 호형호제하던 사이이다.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이다"라며 호언장담하며 협상 테이블에 임하였다.

하지만 국제법 상의 무례를 각오하고 협정을 일방파기한 일본의 사전 준비는 '대표의 사적인 친분을 내세우는 감정적 준비'에 그친 한국 대표단이 감당해낼 수 있는 그러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국가對국가의 관계에서 사적인 친분을 믿고 협상 테이블에 나선 한국측 대표의 정신적 헤이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응징의 대상이었고, 新韓日어업협정 체결 직후 한국 측 대표는 해임되었다.

일본은 이 新한일어업협정 과정에서 무엇을 얻고자 했는가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新韓日어업협정 과정에서 일본측이 얻은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이다. 분명한 것은 그 이전까지는 분명히 독도는 한국의 영토였고 인근 해역은 한국의 영해였고 영해에 대한 권리를 행사해 왔으며 EEZ[배타적 경제수역, Exclusive Economic Zone]의 한국측 최전방 영토로서 역할을 하던 독도와 독도의 영해의 국제법적 위치가 모호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 주권이 침해 받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적으로는 당시 대표였던 수산청 장관의 해임 정도로 그의 '매국 행위'[그는 어떤 의미에서 작은 '을사5적'이 아닌가?]에 대한 처벌이 끝나게 되었고, 국내 정치적으로는 독도 근해 어업 활동에 지장을 받게 된 어민들의 반발을 긴급히 무마하기 위해 폐선비를 두둑하게 지원[어선은 기능이 뚜렷하여 오징어잡이배가 명태잡이배로 바꾸거나 할 수가 없다고 한다.]하며 당시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벗어나는데 급급하였고, 국민들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 채 곧 新韓日어업협정을 잊어 갔다.


- 독도 문제의 역사적 전개 : 2차에 걸친 새 역사 교과서 문제
일본 극우파의 악의적 발악이라 할 수 있는 한중일 역사 왜곡과 관련된 사전이 2000년과 2004년 연이어 발생하였다. 2000년 당시에도 문제시 되었지만, 2004년 역사 교과서 문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라고 하는 극우 성향[일본인의 눈에 비치기로는 아마도 '애국 세력'으로 보이지 않을까? 우리 나라에도 극우 세력은 지천에 널렸고, 그들의 행동을 칭송하는 세력이 많으니..]의 총리가 국가 원수로서 활동하고 있으면서 그 어느 시기보다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그들의 목소리가 힘을 받고 있다.

이러한 역사 교과서 논쟁에 中韓 양국을 선봉으로 동남아 각국이 한마디씩 거들면서 동북아 국제 여론을 형성하였고, 만만치 않은 국외적 압력을 받은 일본 문부성은 새역사 교과서에 대한 수 차례에 걸쳐 감수를 하게 되었고 마침내 새 역사 교과서는 출간하게 되었다. 그러한 절차를 거치며 나온 새 역사 교과서는 문화일보 기자의 사견에 의하면 표지를 떼어내고 읽으면 어느 것이 새 역사 교과서인지 거의 구분하기 힘들 만큼 내용이 교묘해지고, 표현이 순화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다사다난했던 과정을 거치며 출간한 새 역사 교과서는 일본 국내에서 1% 교부에도 실패하여 실질적으로 1만부 내외의 적은 분량만 학생들에게 배포되었다.

하지만 일본 새 역사 교과서 편찬위원회는 국제 분쟁을 통해서 일본 내 관심이 한껏 고조된 시기를 이용하여 교과서로는 예외적으로 일반 판매를 개시함으로서 약 100만부에 이르는 판매고를 올림으로서 절반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새 역사 교과서가 일본 국내적 이슈화에 성공하게된 것에는 韓中 양국이 일본 내 극우 세력과의 수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교과서 분쟁에서 일본 국내 여론은 전후 최초로 어떠한 외압(과거 韓美, 美日안보협력이 긴밀할 때는 일본 내 우경화 경향을 韓日관계를 고려해여 군사협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여 미국이 내부적으로 상당히 억누르는 경향이 있었다.) 공식적인 우경화하는 경향을 드러내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장기 집권으로 표면화되고 있다.


- 독도 문제의 역사적 전개 : 駐韓일본대사의 도발
2005년 2월 24일, 駐日한국대사관에서 정상적인 외교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駐韓일본대사 다카노 도시유키'독도 영유권 발언'이었고, 그것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생했음에 한국을 비롯한 외교가 전체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즉각적으로 국내 각 단체들이 규탄 성명을 발표하며 다카노 도시유키의 추방을 요구했고, 駐韓일본대사관 앞에는 연일 시위가 이어졌다. 하지만, 다카노 도시유키는 지금 이 시간에도 일본 대사관 안에서 정상적으로 집무를 수행하고 있고 일본 본국의 훈령에 따라 정상적인 외교관으로서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駐中한국대사관에서 10년간 근무했던 김 교수님의 외교관적 마인드에 의하면 외교가의 금기 사항 중 하나가 '주재국의 영토 주권에 대한 적대적 발언의 엄금'이라고 한다. 아무리 냉각된 외교 관계를 겪고 있다하더라도 주재국의 영토 주권에 대한 적대적 발언은 있을 수 없고, 그러한 발언은 주재국 대사가 본국에 훈령을 요청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런 훈령 요청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없고, 본국에서 그러한 훈령없이 주재국 대사가 자의적 의도로 '사견'을 공식석상에서 발언할 만큼 30년 가까이 일본의 외교관으로서 활동해온 다카노 도시유키가 외교 관례에 문외한일 리도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모든 정황을 통해서 추리해 볼 때, 다카노 도시유키의 '독도 발언'은 명백히 일본 본국의 훈령에 의해 다카노 도시유키가 외교관으로서의 생명을 포기한 채 내뱉은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주재국의 영토 주권을 침해한 이러한 사안에 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 또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국내 외교가의 각국 대사들을 불러 모아서 駐日일본대사의 망언에 대한 대사들의 규탄 여론을 조성하고, 일본 본국에서 다카노 도시유키를 파면시키도록 유도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당시 그러한 외교적 제스쳐를 전혀 취하지 않았고, 다카노 도시유키는 지금도 여전히 駐韓일본국 특명전권대사로서의 역할을 조금의 지장도 없이 수행하고 있다. 이는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축출된 기존의 숙련된 외교라인을 개혁이라는 용어가 전가의 보도처럼 취급되고 보수라는 용어가 폐가망신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국에서 '보수'라는 이데올로기적 틀 속에서 집어넣어 기업에서 고령 인원을 정리해고 하듯이 그들의 수족을 잘라내고[기존 외교라인을 험지로 보내거나, 이탈시키는 방법] 제 발로 뛰쳐나가게 만들면서 그들이 가진 경험과 국제적 인맥을 잘라내고, 그 빈자리를 아직 신참내기인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 놓은 결과라 여겨진다. 권력 이양 과정에서 기존의 정치권력 집단이 물러나고 신권력의 보좌진들이 요직에 오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외교 라인은 그렇게 권력에 따라 좌지우지되어서는 안된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또 한 번 독도에 대한 영토 주권을 행사하는 한국의 국제적인 지위는 모호해지게 되었다.


- UN문제를 둘러싼 갈등 : 상임이사국 확대와 G4의 진출 시도
[미국의 이라크 전쟁 수행 과정에서 보여준 일본의 충성심(?)은 여느 다른 국가들(폴란드, 스페인 등을 비롯한 속칭 폴란드 사단)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당장의 명분과 민족 자존심을 버리고 강자의 꽁무니를 쫓는다는 비아냥을 감수한 댓가는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적극지지와 美-日신안보공동선언이라는 그들이 오랜동안 학수고대하던 '보통국가'를 향한 그것들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일본을 비롯한 G4국가(독일, 일본, 인도, 브라질)들은 상임이사국 입성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2004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UN총회에서 UN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공식적으로 희망하면서 UN 규정 개안을 위한 2/3 지지 확보를 위해 독일, 브라질, 인도 등과 연계해서 사실상의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입 시도는 단순히 일본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진입한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은 일본의 국내헌법의 근본부터 뒤흔드는 결과로서 국군이 없는 일본을 부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상임이사국은 전 세계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자국의 무력의 국외 행사를 불사해야 하는 국제법상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로서 '보통 국가'가 아니고서는 그 역할의 정상적 수행이 불가능하다 할 수 있다.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은 2차 대전의 패전국으로서의 멍에를 벗어던짐과 동시에 합법적인 군사력 무장을 국제 사회로부터 용인 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제국주의 시절 일본의 패권적 정복 활동에 희생되었던 근현대사를 가진 동아시아 각국에 강력한 거부감을 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한국과 일본 주변국들에게 그리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코피 아난 UN사무총장은 21일 '권고(권고는 UN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강제력으로 실질적으로 안지켜지면 그만이다. 실제로 UN은 '유일패권국' 미국의 후원이 없다면 허수아비와 다름없다.)'를 통해서 "2005년 9월 UN총회에서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을 현행 15개국에서 24개국으로 확대하고 상임이사국 또한 확대하는 방안을 통과시키길 희망한다"라고 메시지를 날렸다. 이에 일본 외무성은 코피 아난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고 판단하며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의 무드가 무르익었다고 자체 판단하며 이 권고에 적극 지지를 표명하고 나섰고, 다른 G4 각국들도 유사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은 매우 우호적인 편이다. 여론조사기관인 글로블스캔과 미국 메릴랜드대의 `국제정책태도 프로그램(PIPA)'의 공동 여론조사작업에 의하면 2차 대전 후 전후 복구 사업과 보상 사업을 활발히 펼쳐온 독일의 경우 조사 대상 24개국 중 21개국이 찬성하였으며 특히, 독일의 주변국인 영국(79%), 프랑스(86%), 이탈리아(79%)등의 높은 찬성을 보임으로서 상임이사국 확대시 진출이 확실시 된다. 반면 일본의 경우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 주변국인 중국, 한국에서 각각 76%와 54%가 반대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일본이 독일 다음가는 지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 일본 내부적으로도 상당히 고무되어 있는 듯하다. 비록, 그 자리가 비토권이 없는 허울뿐인 상임이사국이라 하여도 당장의 일본에게는 큰 수확이 있고, 장기적으로 멀지 않은 장래에 미국과의 공조를 긴밀히 하기 위해서 미국이 일본의 비토권 부여를 통해서 '일본 달래기'에 적극 나설 것임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 UN문제를 둘러싼 갈등 : 미국의 일본 공식 지원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과 중국에게는 사실상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3월 19일 날아 들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아시아 순방 차원에서 방문한 일본에서 "일본의 UN안보리 상임이사국 입성을 지지한다"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공식 석상에서 일본을 지지한다는 발언을 한 것은 이미 미국 내부적으로 일본을 UN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국제외교적 복안을 완성했다고 파악할 수 있다. 미국은 한국처럼 선언적인 공언(空言)을 국제 외교 석상에서 하지 않는다.

이처럼 미국의 일본 지지가 공식화된 점에는 어떤 것들이 영향을 미쳤을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우선 기본적으로 미국의 극동지역 국제 외교의 기본 노선은 '현상유지'에 모든 촛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현상유지'라는 단어의 의미는 극동 지역의 힘의 역학 관계가 지금 현재의 이 상태 그대로, 그러니까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미국이 최강인 상태로 나머지 국가들이 아웅다웅거리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대외 정책 내부에 깔린 보수주의 정책노선은 조지 W. 부시의 외교 정책 노선과 부시 정책의 씽크탱크(Think Tank)라고 할 수 있는 신보수주의의 본거지 A.E.I.(미국기업연구소, American Enterprise Institution)의 여러 논문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美日신안보공동선언'제정 등을 통해서 지역적 국제 여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일본의 국제적 역량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많은 국내 석학들은 '韓-美동맹의 약화'를 1순위로 지적하고 나선다. 미국의 극동 지역의 국제전략은 美-日, 韓-美 양대 군사조약을 축으로 형성된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자주국방노선('韓-美 연례국가안보회의'를 위해 작년 방한한 도널드 럼즈펠드와의 협의 이후 이는 '협력적'자주국방으로 변경된다.)과 노무현과 국내 여론의 親中/反美的 성향, 미국 내의 신보수주의 세력 중에서도 콘돌리자 라이스, 도널드 럼즈펠드, 폴 울포비츠, 존 볼튼 등의 강성 정치인들의 득세, 9-11테러 이후 미국 내의 급격한 보수반동 경향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韓-美군사동맹은 급격히 취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9-11테러 이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해 있는 미국 내 매파 정치인들의 對韓/對北정책에 대한 반발이 미행정부에 주도 세력들에게 유효하게 작용함으로서 취약해지는 韓-美동맹을 재건하기보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미국의 MD(Missile Defense)계획에 참여하고, 국제적 동의가 있기 전에 조기에 이라크에 무장 자위대를 파병하는 등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여러 차례 보인 일본과의 군사 동맹을 강화하고, 부분적 다원주의 차원에서 지역패권을 추구하는 국가들 중에서 가장 미국에 우호적이고 미국이 컨트롤 간으한 국가로서 일본을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동북아 각국의 영토 분쟁
이렇게 복잡한 동북아 각국의 역학 관계에 결정적인 암초는 '영토 분쟁'이다. 韓-日간의 독도 분쟁, 中-日간의 조어도 분쟁, 러-日간의 북방 4도 분쟁, 韓-中간의 고구려, 발해사 분쟁(궁극적으로 영토분쟁이라 할 수 있다.)이 그것이다. 이러한 영토 분쟁이 해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우선 분쟁 당사국들 각자가 한국을 제외하면 국제 사회에서 상당히 강대국으로서 그 입지를 높고, 단순히 경제적 이익 차원이 아닌, 지역패권 확보의 전초전적인 경향을 띄게됨으로서 그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게 하고 있다.

동북아 4강 중 하나로서 이들 분쟁에 어쩌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완전한 중립'을 지향하고 있지만, 최근에 와서 내부적으로 일본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당장 독도 문제만 하더라도 며칠 전 콘돌리자 라이스의 방한 중에 노무현 대통령의 독도의 실효지배와 독도가 한국 영토임에 대한 당위성을 역설하는 시간에도 콘돌리자 라이스는 침묵과 딴청으로 일관함으로서 미국의 어지간한 대외 정책이 해방 이후 대대로 이어져 오던 한국의 입장 지지에서 한 발 물러서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 사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중국 또한 韓日간의 독도 분쟁에 대해서 공식적인 어느 한편을 지지하는 것을 꺼리고 있고, 이는 러시아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실상 한국은 독도 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거대 강국 일본(그리고, 암묵적 지지국인 미국)에 맞서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국제적 상황은 결국 노무현 정권의 對美외교 참패와 다름 아니다. 애초에 중국은 미국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노무현 정권(또는 노무현 개인)은 판단하지 못한 것인가? 지난 유럽 순방에서 있었던 노무현의 '親中的 발언'과 '우회적인 미국에 대한 비난'은 결정적으로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의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견제를 최우선 외교정책 과제로 설정하고 GPR(Global Defense Posture Review)을 통해서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 성격 변화를 통하여 신속기동군화하여 중국-대만의 양안과 중동 등의 예상 분쟁 지역을 신속히 무력제압하는 것(현실적으로 對中용 전략이다.)을 골자로 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맹방인 한국의 배신행위(?)는 프랑스의 선례를 경험한 미국으로서는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미국의 세계전략이 어디까지 진행되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 내부적으로 對美외교노선에 전향적인 변화가 없는 한, 더 이상 미국이 과거처럼 한국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과 동북아 정세를 둘러싼 빅딜의 가능성
그렇다면 이러한 국제 정세가 독도와 어떻게 연관지어질 수 있는 것인가?
일본은 궁극적으로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서 국제분쟁지역으로 공식적으로 인정 받기를 희망한다. 또한 실제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본은 승소할 만큼의 충분한 역사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 [매우 불운하게도 국제사법재판소는 한국과 일본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보다, 가장 최근에 독도에 대한 국제법이 인정하는 영유권이 어느 국가에 있는가 만이 관심의 대상이며, 국제사법 재판소는 그 어느 법정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다.] 한국은 감정적으로 일본에 비우호적인 '아시아 국제사법 재판소'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는 듯 하지만, 이것 또한 상임이사국 진출 투표권을 놓고 세계 각국에 엄청난 금액의 무상원조를 약속하며 표심을 얻고 있는 일본에 맞서기에는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UN과 국제 사회는 '로비스트의 천국'일 뿐이다.

이러한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일부에서는 강대국들 간의 '빅딜' 성사 가능성을 제기한다. 오는 9월 UN안전보장이상회 회원국 확대를 포함한 UN개혁안에 비토권을 가지고 있는 러시아, 중국과 관계된 조어도, 북방 4개 도서에 대한 분쟁을 일본이 과감히 포기할 가능성이다. 조어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과 중국이 반국가분열법까지 제정하며 강하게 대만 독립을 반대하는 중국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더 이상 대만과의 관계(천쑤이벤 총리의 방일 등)를 포기하는 대신, UN총회에서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 지지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을 지지해 주는 것으로 중국과의 분쟁을 마무리 짓고, 2차 대전의 패전으로 빼앗긴 북방 4도에 대해 원천적으로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일본이 러시아에 군사적으로 중요시 여기는 북방 4도의 일부 또는 전부를 포기하는 대신,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인정과 UN안보리 상임이사국 확대안 지지를 약조 받고 일본은 최종적으로 UN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와 독도를 국제법적으로 확보한다는 딜의 성사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 모든 딜의 과정에서 미국이 美日신안보조약의 강화와 일본과의 유대 강화 차원에서 일본의 주장을 중국과 러시아에 적극 피력하며 협상을 종용할 가능성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에는 미국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동북아의 小國 한국의 입장은 완전히 무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그나마 가장 한국의 안보를 보장받을 수 있는 미국에 의지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미국은 사실상 잃을 것이 없다는 상황 속에서 나오는 예상이다. [경제적으로는 일본에 잠식되어 있고, 수출 판로는 中/美 양국에 거의 의존되어 있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김영삼 정권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인해 채권과 여러가지 권리조차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거나, 스스로 포기했다.]

나는 처음 이 가능성을 접했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결코 낮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또 한 번 놀랐다. 이것은 김대중 정권 말기[조지 W. 부시 신행정부가 출범한 이후]부터 '경솔한'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며 전개된 對美외교가 참패했음을 의미하며 그리고 이러한 정황이 가설로서 설득력을 가짐은 '對美외교 실패가 가져온 역풍'이라 할 수 있다.


- 무엇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결론은 자명하다.
국제 사회는 힘을 통해서 움직인다. '힘(Power)'은 비단 군사적인 면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 기타 복합적인 역학관계를 총괄한다. 노무현 정부는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 그 역학관계에 순응하려 들지 않았고, '자주국방', '자주외교'라는 국내정치용 선전문구를 국외에 그대로 적용하는 愚를 범하고 말았다.

자주국방, 자주외교는 듣기엔 참으로 좋은 말이다. 하지만, 우리보다 훨씬 강한 일본이 왜 자주 국방을 하지 않고, 미국과 함께 MD계획[MD계획은 우회적으로 미국 또한 자주 국방에 자신이 없음을 의미한다.]에 뛰어들고, 누가봐도 미국의 엉덩이를 핥고 있다는 인상이 진하게 베어나는 외교 정책과 노선을 펼치는가? 그것은 자주국방, 자주외교가 주는 달콤한 유혹보다, 현실이 가진 냉엄한 공포가 더 두렵기 때문이다. 강력한 경제력과 가능성을 무기로 100여년 만에 다시 한 번 지역 패권국으로서 그 입지를 다지려 하는 중국과 BRICs의 하나로서 10년내 국민소득 2배를 꿈꾸는 한때 양대 패권국이라는 영광을 꿈꾸는 러시아 사이에서 미국의 후원이 없이는 일본에게 승산이 없다는 현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우리는 주변 어느 국가보다 작고 왜소하며 나약하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전략급 핵을 실은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 Inter-Continental Balistic Missile] 1방이면 사실상 국토 전체가 전멸을 한다. 자주국방이란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꿈이었고, 우리 현실에 지나친 부담이 가중되는 계획이었다. 결국 일본조차 등질 수 없었던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외면하려한 댓가가 이러한 가설의 전개가 허무맹랑하지만은 않은 논리가 될 수 있다는 현실로서 다가왔다.

무엇이 문제인가? 글을 쓰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공든 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지만, 한 번 무너지면 다시 그만큼 공을 들여야 한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이고, 더욱 심각한 것은 그 공든 탑이 지금 무너져 있다는 것이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우리 주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中외교관 “中, 한국 주도 통일 원치않아"

기사 보기 :

매우 촉각이 곤두서는 기사가 아닐 수 없다. 일전에 관련글을 썼던 기억이 나는데, 그 때와는 조금 다른 부분에 대해 의사 표현을 해보고자 한다.

[각국은 저마다 무슨 계산을 하고 있을까?]


그 동안 비공식적으로 중국이 한국 통일에 부정적인 늬앙스를 풍기며 많은 국제정치학자들로 하여금 중국의 의중을 연구토록 하고, 다양한 가설을 내도록 하였지만, 이처럼 직접적인 발언을 한 것은 거의 처음이 아닐까 한다.
보수주의 베이스의 진보적 싱크탱크 브루킹스 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 미국은 기본적인 베이스가 보수주의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한국과 같은 특수한 상태의 국가에서 '진보 성향'이라고 단순히 묘사하면 많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외교관이 직접 이와 같은 발언을 한 것은 중국 공산당 차원에서 상당한 입장 정리를 마친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예를 들면 어차피 한국은 자극해도 자신들의 경제적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종속된 경제 구조를 가진 국가이므로, 북한을 달래는데 총력전을 펼치기로 내규를 정했다거나 하는 가설이 가능하다.]

이미 수많은 연구 보고서를 통해서 중국이 북한을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동구권처럼 민주주의 세력의 접근에 대한 일종의 완충지대(Buffer-Zone)으로서 활용하고자 부적절한 권력 집단인 김정일 체제의 유지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최근 경제적 지원과 국제 정치적 후원(김정일의 중국 방문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 측의 극진한 환대는 북-중 유대 과시와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 재확인, 6자 회담 등에서 핵심적인 키 포인트를 중국이 쥐고 있음을 과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을 아까지 않고 있는 점과 더불어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에 대비해 압록강-두만강 국경선에 탈북자 감시를 핑계로 중국 공안 병력이 아닌, 중국軍병력 10만명이 전진 배치되어 언제든지 북한 지역 내로 진출이 가능하다는 점 등에서 중국이 북한과 (북한 정권 붕괴시의) 북한 지역에 대한 영향력(내지는 영유권) 논쟁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대내외에 천명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함께 에번스 리비어 미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차관보 대행(차관보 지명자는 크리스토퍼 힐 駐韓 미국대사)은 한미 양 정부 당사자 간에 6자 회담에서 韓-美 유대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는 재차, 삼차 반복된 주장과 상반되게 한국과 미국의 의견차가 분명히 존재함을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서 미국 내부적으로도 '한국에 대한 입장 변화가 생겼을 수 있음'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다.

물론 인터뷰 상의 표현은 매우 우회적이고 가벼운 수위의 정책갈등에 대한 발언이었지만, 외교부 관료 대행인의 발언 또한 분명히 외교적 발언이고 외교적 발언의 표현 수위는 일반적인 대화에서 표현하는 대화 수위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때, 미국 측의 한반도 정책에서 무언가 기존과는 다른 이상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염려해볼 수도 있다.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하는 미행정부에서도 한반도 정책에 대해 대표적인 强性 매파 중 한 명인 John Bolton 국무 차관을 UN美대사로 임명하는 등, 미국이 6자 회담에서 북핵 해결에 실패할 경우, UN을 통해서 더욱더 강성 정책을 펼칠 수도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존 볼튼의 UN대사 파견은 조지 W. 부시의 6자 회담 우선 정책에 지속적으로 반발하는 존 볼튼에 대해 합법적 좌천(?)의 한 방법으로 美행정부 내부의 잡음을 최소화하겠다는 부시의 6자 회담 해결 의지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추리는 리비어 대행인의 2번째 발언(6자 회담에서의 유동적 자세 가능성)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상대적으로 UN에서 미국의 입지는 美행정부에서처럼 결정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6자 회담장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한국 측 대표자의 공허한 발언(6자 회담에서 과연 한국은 어떤 외교적 의지를 표명하고, 관철시킬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면 그 답변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가히 절망적이고 치욕스럽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의 현재 국력이다.)과 북핵과 납북자를 핑계로 핵무장(또는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희망하는 듯한..)을 미국에게 승인 받으려는 듯한 인상을 주는 일본, 동아시아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지만,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에는 눈뜨고 당하기 싫어하는 북한이라는 오징어에서 북핵 회담에 꼽사리 끼어서 '실리'라는 다리를 하나 뜯으려고 하는 러시아의 정말정말 공허하기 짝이 없는 발언 등, 공식적인 6자 회담장 내부에서의 파워 게임 순서대로, 각국 대표자의 발언이 비중있게 들려오는 것이 마치 모의 6자 회담(?)을 보는 듯하다.


북한은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 밖에 없다. 지구상에서 북한에게 정치/이데올로기적으로 우호적이면서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는 국가는 중국 단 하나 뿐이며 중국의 지원없이 북한은 그 체제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겹다. 동북아에 위치한 세계적 초강대국과 북한의 위협 속에서 숙명적으로 자주 국방을 이룩할 수 없는 한국에게 철벽의 안보를 보장해 주는 미국의 영향력에서 한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문제가 6자 회담을 통해서 평화롭게 해결된다면 북한과 한국이라는 피보호자(?)를 거느리고 있는 美-中간의 대화가 주가 될 것이고, 일본과 러시아는 그 사이에서 양국에게서 '실리'라는 다리를 뜯어가려 할 것이다. (아니면 일본도 미국 등살에 밀려 한밑천 뜯기던가.. 고이즈미 내각이 유지되는 한 충분히 뜯길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내 나라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아주 재밌게 지켜볼텐데, 내 나라가 들러리로 끌려 다니니 그다지 재밌는 수싸움 게임으로만 보여지지 않는 것이 한국인으로서 느껴야 하는 비애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과학'이란 무엇인가?

한 교수에게서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어처구니 없기도 했지만, 갑자기 궁금해졌다. 한 번도 제대로 그것에 대한 물음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블로그 글 쓰듯이 써서 학교에서 발표(?)를 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다소 뜬금 없는 질문일 수 있겠지만, '과학'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당황스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를 비롯한 일반인들에게 과학은 '과학'이라는 단어 그 자체로서 꾸준히 존재해 왔고, 과학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조금도 물음표를 달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과제로 인해 나는 과학이 무엇이고, 오늘날 과학이 이룩한 것과 과학이 당면한 과제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쉽지는 않다.)

먼저 '과학'에 대해 사전적 의미를 찾아 보면 과학은 '자연 세계에서 보편적 진리'라고 해석한다. '자연 세계에서 보편적 진리'라는 사전적 의미처럼 우리는 누구도 '과학'이 가지는 보편적 진리, 즉 '절대적 권위'에 대해 감히 거역하지도, 의문 부호를 달아 보기도 힘들었다는 것을 발견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과학은 사전적 의미처럼 대중들에게 보편적으로 널리 지지 받는 이론이었고, 과학에 근거를 둔 이론과 학설들은 언제나 대중에게 지지를 받았고, '보편적 논리'로써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과학적'이라는 말은 '신성불가침'과 은연중에 동의어가 되어 있었다.
과학에는 인문/사회 과학에서의 과학과 실용/자연 과학에서의 과학 등이 있다. 인문/사회에서 과학이라 함은 어떠한 사회 현상이나, 사고를 정해진 답은 없으나, 다양한 법칙을 통해서 그것을 설명하고자 함에 목적을 두고 있고, 실용/자연 과학에서의 과학은 어떠한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공식을 만들고자 함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시도와 노력을 통해서 과학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 세계에서 보편타당한 진리를 확보하고, 대중의 동의를 받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겠다.

실제로 과학은 그것이 가지는 이성적인 면을 극적으로 활용하며 대중과 저마다 다양한 학문을 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깊은 신뢰와 믿음을 쌓아갔다. 모든 의문에 대한 답과 가설은 과학적인 논리와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고, '과학적이지 않은 것'은 '어리석은 것/미개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처럼 과학은 우리 사회(자연 세계)에서 보편타당한 진리로서 그 확고부동한 믿음을 굳건히 해왔다.

이처럼 학계와 현실 세계에서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던 '과학이라고 하는 종교'에게 최근 도덕성 논란이 이슈화 되기 시작하였다. 그 중 하나가 '복제양 돌리'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촉발된 '과학의 비윤리성'이다. 과학이 가지는 절대적 권위를 극대화했다고 볼 수 있는 생명 복제는 기존 사회에서 과학이 가졌던 '생명 연장'의 영역을 넘어서 '생명 창조'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권리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생명 창조의 영역을 '신의 영역'으로 여기는 종교계와 과학의 무한에 가까운 영향력을 두려워한 일부 대중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과학의 비윤리성이 제기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학의 비윤리성이 제기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성이 죄악시 되던 신정(神政)시대(중세유럽의 시대)를 넘어 르네상스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인간은 과학이 가져다 주는 이성적 사고의 혜택을 누려왔다. 그러나, 인간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하고자 했던 과학의 발달이 고도화 되면서 오히려 인간 소외와 비인간적인 모습을 발현하기 시작하었고, 그러한 과학의 비윤리성에 대한 적대 의식의 일환으로 '러다이트 운동 (Luddite Movement)'과 같은 과학의 발전에 반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등 과학은 절대적 권위가 위협받음과 동시에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는 과학의 윤리성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결국 그 관점의 무게 중심을 어디로 두는가에 따라 결론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이 보여준 가능성과 그로 인한 생명 연장, 심지어 생명의 (재)창조를 통해서 인간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겪게 될지도 모를 고난을 최소화할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도덕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과학의 비윤리적인 측면은 묵인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이 가져다 주는 문명의 축복보다, 인간성 회복에 더 큰 주안점을 둔다면 과학의 비윤리성과 무차별성에, 과학의 발전을 경계하고 불신하게 만들게 되고 과학의 발전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문제의 동인(動因)은 명확하다. 하지만, 그 문제의 동인을 해결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관점이 가지는 극단적이고 타협할 수 없는 이상의 거리 속에서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자신의 정체성 확립과 과학이 가지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UN분담금 문제

한국의 UN분담금이 8100만 달러 정도 연체가 되어 있다고 한다.
연체 이유는 당연히 환상적으로 낮게 배분되어 있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의 1년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2004년도 외교통상부의 1년 예산이 여성부-한국과 뉴질랜드만의 특수한 부처다-보다 적었다.)

개인적으로 UN의 역할이 앞으로도 1950년 6월(한국 전쟁 참전 결정)의 영웅적 결정(당시 자유 중국의 대표성을 둘러싼 미-소간 갈등으로 소련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보이코트하고 있지 않았고, 소련 UN대사가 교통편이 막혀서 이사회장에 불참하지 않고 비토권을 행사했다면 한국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불을 보듯 뻔하다.)을 다시 내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다. 한국 전쟁은 전비의 98%이상을 미국이 부담하여 미국이 한국 대신 싸워준 대리전과 다름 없는 것이었지만, 그 깃발은 엄연히 UN기를 앞세우고 있었다. (실제로 전쟁은 10월 1일, 28선 경계에서 북한군의 심야 기습을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분을 참지 못한 미군 1개 부대의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북진과 이에 적극 호응한 한국군 3사단의 진격으로 평화유지군으로서의 활동 영역을 넘어서게 되어 훗날 논란의 대상이 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전쟁 당시 UN기를 앞세우고 2차 대전의 탄흔이 사라지기도 전에 참전하여 총력전을 펼친 미군과 연합군의 활약은 부정할 수 없다. 탱크 한 대 없는 한국군이 총알받이 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UN군의 활약과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지원은 휴전 이후에도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유지해 나갈 수 있는데 절대적인 힘이 되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이익에 근거한 것이라는 논란의 여부를 넘어 명백히 우리의 생존을 지속시켜 주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국가의 생존을 미국으로부터 조약-한미상호방위조약 (동맹조약이 아니다.)-으로 약속 받기 위해 CIA의 암살 위기로까지 자신을 내던진 이승만의 역할 또한 이후의 정치적 역할과는 다른 의미에서 분명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CIA비밀해제문서에 반공포로 석방과 관련하여 분노한 아이젠하워의 이승만 암살 논의가 기록되어 있다.]


한국 전쟁에서 유일하게 UN기로서 전쟁에 참전한 이후, 베트남전, 르완다 내전, 앙골라 내전, 소말리아 내전, 캄보디아 내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중동) 분쟁, 바스크 분쟁 등 제3세계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전쟁과 내분에 PKO는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PKO군은 제3세계 빈곤국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여 PKO군 상당수가 사실상 전투력을 가지고 있지 않고, 한국 전쟁 당시처럼 막강한 중무장이 아닌, 간편한 개인 화기 정도의 무장으로 문자 그대로 PKO(Peace-Keeping Operations, 평화유지작전/활동)에 제한을 두고서 PKO가 관여하는 그 순간 그대로의 상황이 유지하는 것에 그침으로서 전황의 유불리에 따라 불만 세력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분쟁의 불씨를 남긴 채 그 활동을 종료하거나, 무기력하게 분쟁을 지켜볼 뿐이다.

이러한 모든 PKO 활동의 한계는 과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89년 12월의 몰타 체제 성립 이전 시기와 달리, 자국의 이익이 관여하지 않는 지역에 무리하게 참전과 중재 활동을 하길 꺼려하는 서방선진 7개국과 일본(군사적 강대국과도 정확히 일치한다.)이 PKO활동을 불필요한 국력 소모로 여기고, 국제 사회 구성원 스스로도 복지부동의 입장을 견지하므로서 자신에게 총부리가 겨누어지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적은 비용으로 아프리카 빈국들의 전투 능력이 거의 없는 용병(그 나라에서는 정규군이지만..)에게 푼돈을 쥐어주고 PKO군 철모를 씌우고 진지나 지키게 하자는 것이 더 싸게 먹히면서 명분을 세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그 빈국들이 자청해서 PKO군을 지원한다.) 이는 국제 사회에서 매우 자연적인 이치이고, 이러한 부분은 신현실주의적 세계관에 매우 잘 들어 맞는다. (어쩌면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지면서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강화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한국 전쟁 이후의 모든 분쟁들에서 무력하기만 한 UN과 UN군의 초라한 현실, 결국 UN 또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1차 대전 직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해 창설된 최초의 국제기구, 그러나 정작 미국의회는 국제연맹 가입안을 부결시켰고, LN은 그 즉시 유명무실화되었고, 히틀러 전쟁을 막지 못했다.)처럼 강대국, 좀 더 좀은 범주에서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기생해야만 하는 초라한 운명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PKO군의 활동에 중점적으로 서술하는 까닭은 한국의 유엔분담금의 84%가 PKO활동비이기 때문이다. (텍사스 레인저스에서의 박찬호 연봉 총액과 엇비슷하다. = =..) PKO활동은 활동이고, 돈은 돈이다. 결국 한국은 몸으로 뛰면서 돈도 내야 하는 처량한 신세인 것이다.
한국의 유엔 분담금은 유엔 전체 예산의 1.7%에 해당하지만, 한국이 UN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직원(JPO포함)의 비율은 1%에도 미치지 않는다. (반면, 작년말 강연에서 만난 외교통상부에서 파견된 강사의 말에 의하면, 만성적인 체납국인 인도는 UN에서 미국을 제외한 단일 국가로서 최대 직원을 파견하고 있다. UN은 인도의 고급 인력을 먹여 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은 또다른 체납국 미국과 달리, 일개 유엔 가입국에 불과하다. 미국의 후원이 없으면 UN내에서의 발언권도 이만큼 국가가 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약하기 짝이 없다. 미국의 지지가 없으면 바로 UN이 유명무실해지는 것과는 달리, 한국은 UN에서 무언가를 얻어내야 할(또는 유지해야 할) 것들이 있다. 결국 유엔 분담금은 언젠가 내긴 내야할 돈이다. 내야할 돈이라면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권리를 확실히 요구하고 되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1.7%(2005년도에는 이보다 더 상향 조정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에 해당하는 우리의 발언권과 UN내에서 우리 직원의 인원을 확충하고, 미국의 후원이 나날이 줄어가는 현실에서 작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루트 확보가 시급하다.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UN이 아무리 힘없는 늙은 호랑이에 불과하여도, 아직 UN내에서 무언가 얻어낼 만한 것이 있다면 얻어내야 한다. PKO 비효율적인 구조에 불만이 있다면 1.7%에 해당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더 이상 UN군이 한국전쟁에서와 같은 UN기를 앞세운 참전은 없을 것이다. PKO는 마치 선진산업국들이 국제 사회에서 내전을 겪는 빈국들에게 보이는 최소한의 아량과 일종의 '감화(본국화?)사업'일런지도 모른다. 장기적으로 볼 때, 무작정 헛돈이다고도 볼 수 없는 괜찮은 투자일지도 모른다.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국제사회는 '제로섬 게임'에 가깝다. 우리의 이익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하고, 그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외교통상부의 예산 대폭 증액을 통한 외교력 증강과 정부 기관의 효율성 증대로 인한 예산 절감이 필수다. (미국의 이집트 대사관과 한국 대사관의 인력을 모으면 한국 외교통상부+재외공관 직원 전체를 합친 것과 비슷한 인력이 나온다. 한국의 현재 외교력은 이 정도 수준에 머무는 것은 어쩌면 숙명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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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글리 코리언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음지.

소위 진보신문이라고 자칭하는 한 신문사의 컬럼 전문 페이지는 나의 애장품(?)이다. 왜냐하면 그 컬럼 페이지의 많은 글들은 상당히 유용한 정보를 지녔으며 깊은 이해를 갖추지 못한 제3세계 지역에 대한 정보를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 계열의 언론의 특징은 제3세계 빈곤층을 심층 보도하길 즐긴다는데 있다. 제3세계의 빈곤은 제1세계의 착취와도 직결되고, 자본주의 산업 구조의 신자유주의적 사조에 태클을 걸 수 있는 '전가의 보도'이다.)
국제 사회에서 제3세계가 가지는 의미란 너무나 미미하고 피동적이고, 객체지향적일 수 밖에 없다. 당연히 깊은 연구를 필요로 하는 국가나 지역이 제한될 수 밖에 없고, 제3세계의 소수 주류를 벗어난 제3세계의 제3세계는 그저 그런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정보만 알아도 충분할 만큼 '국제 사회'(나는 언제부턴가 이 국제 사회라는 용어의 범위를 제1세계와 산업화에 성공한 제3세계 일부로 한정하고자 하려는 내 안의 시도가 생기기 시작했다.)라는 측면에서 그 '존재의 가벼움'이란 참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피상적인 시각은 그러한 정도의 '3류 국가'에 제한되는 것이지, 그러한 수준의 시각으로 제도권의 주류에 진입해 있는 국가를 바라 보는 것은 매우 불합리할 수 밖에 없고 심할 경우,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대는 꼴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나는 오늘 한 (자칭)진보계 신문사의 컬럼 페이지에서 모 야권 정당의 정치를 모르고 보좌관도 쓸 줄 모르는 무지몽매한 늙은 공주의 아버지에 대해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사례만을 제시하며 그의 권력독점욕이 넘치는 정치적 야욕과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용서될 수 없는 민중의 희생을 강요한 측면에 대해서 피상적인 몇가지 예시만을 들며 신군부 정권 붕괴 이후 수도 없이 진행되어 오는 '우리의 과거사 부정 작업'의 한 단면을 보았다.


나는 '고경태'라고 하는 그 신문사의 신문 기자가 가련해지기 시작했다.
'개발 독재'로 대변되는 그 시대를 살아왔을 그가 한국에서 계속 성장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가 제시해 놓은 것들은 그가 피력하려고 하는 사고에 유리한 것만 선별해서 모아 놓은 어린애의 입맛을 맞춰주기 위한 '편식'에 불과하다.

그는 당시 한국의 상황을 깡그리 부정했다.
국민 소득 100달러가 채 되지 않았던, 사회간접자본이라고는 눈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고, 국가 예산의 70~100%를 충당하던 미국의 무상원조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여 베트남전 참전 직전에는 1억 1천만 달러 수준으로까지 떨어졌고, 소련-중국-북한의 북방 삼각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주도로 성급하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던 남방 삼각 동맹을 위한 한일 수교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 민간 차관 1억 달러는 현금이 아닌 산업 자재로 받을 수 밖에 없었던 탓에 일본에 대한 경제 종속은 심화(눈에 빤히 보이는 진행 과정임에도 그것조차도 아쉬웠던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보릿고개를 넘을 때마다 사정없이 죽어 나가던 국민들과 전국민 실업률 30%를 넘나들던 세계 최극빈국 한국의 현실을 기억하라.)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고경태 기자가 베트남전을 '박정희의 로또복권'이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적절한 묘사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박정희 뿐만 아니라 한국과 한국민 전체에게 주어진 대박 가능성 100%의 다시 없는 로또 복권이었고, 그것은 눈에 빤히 보이는, 입 앞까지 스푼으로 떠먹여 주는 요플레와 같은 성공 카드였다. 무능력한 이상주의는 결코 줄 수 없는 國富를 삽으로 마구 뜰 수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금광과도 같은 것이었다.

베트남전 참전을 위해서 군부 정권은 최초 John F. Kennedy와의 파병 약속과 달리, 소수의 간호단과 태권도 시범단을 파견하여 구색만을 갖추며 미국의 추가적인 오퍼를 유도하였다. 미국과 박정희 군사 정권은 수차례 회담을 거친 끝에 베트남전의 군수 물자를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공급한다는 조건(베트남전 당시 군수품 수리는 필리핀과 대만에서 이루어졌고, 이는 대만과 필리핀의 산업구조를 개선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과 2차 파병 당시 한국군의 임금을 거의 100%가까이 인상을 하여 미군의 70% 수준까지 올렸고(당시 한국과 미국의 소득 수준의 차이를 감안해 보라. 한국으로서는 대박도 이런 대박이 없다.), 파병을 통해서 미국의 무상 원조도 다시 2배 이상 증가하였고(일본은 최초 3억 달러를 제외하면 모두 차관 형식이었고, 그나마도 현물로 넘겼다.),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서 완전히 앉아서 당할 수도 있었던 1970년대 카터의 주한 미군 철수(이는 실제로 닉슨 재임시절 계획 완료된 미군 재배치 계획으로 카터는 단순히 실행자였을 뿐이다.)를 물고 늘어져 당시 금액으로 천문학적인 15억 달러의 한국군 현대화 무상 지원금과 당시 미국 이외에는 서방 어느 나라도 보유하지 못했던 최신예 전투기 팬텀기를 다수 인도 받아 비행단을 창설하였다. [당시 일본조차도 팬텀기로 조직된 비행단이 없었다.]

- 내 주머니의 돈까지 모두 퍼주면서도 빌빌거리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는 적어도 對美외교에 있어서 만큼은 질적으로 달랐다. 그것만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지금 노무현이 완전히 물갈이하고 기존의 외교 라인을 짤라버리고 교체한 외교 라인은 정말 '박공주당' 말마따나 '등신외교' 밖에 할 수 없는 무능한 집단일지도 모른다.


우리 젊은이 5000여명(전사자)이 베트남에서 흘린 피가 그토록 천추의 한이 되고, 죄가 되는가? 그들 5000여명이 희생함으로서 오늘날 4700여만명 우리 한국인이 이만큼 살게 되었다. ('규모의 경제'를 기억하라.) 그 때 그들이 베트남전에서 죽지 않았다 한들, 60년대 극빈국 한국 안에서 그 전쟁 수행기간동안 참전하지 않음으로서 더욱 감축되거나, 심지어 끊겼을 미국의 무상 원조로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었을지도 모를 또다른 우리 젊은이들의 피를 생각해 보라. 그것이 무조건 박정희 군사정권의 권력욕만으로 점철되는 악행이 될 것인가?


['전쟁'은 '전쟁'이다. 전쟁은 병정놀이도 병영체험도 아니다. 전쟁터에서 인권을 논하는 자, 자신이 부르짖는 인권의 외침 속에서 홀연히 죽어 가리라. 그리고 잊혀지리라. 어느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않은 채..]

'라이따이 한'이 그토록 죄스러운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그토록 죄스러운가?
전쟁의 본질이 무엇인지, 총 한 번 쏴보지 않은 자들의 낭만어린 평화론은 아닌가? 게릴라전이었던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파악하지 않고서 민간인 학살을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안될 것이다. 게릴라는 정규군이 아니다. 게릴라는 민병대처럼 민간인 복장을 하고서 적대적 군사 행위를 하는 자들을 상대하는 전쟁이다. 그들은 손에 쥐어진 총을 놓는 순간 민간인으로 돌변한다. 왜 모두가 베트남전이 게릴라전이었다는 사실은 알면서 게릴라의 본질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가..



완벽한 惡 자체로 뭉친 인간이 있을 수 없듯이 박정희 군사정권이 이룩한 순기능적인 면은 순기능적인 면 그 자체만으로 평가해 주어야 한다. 어느 하나만 잘못하면 전체를 매도하고, 잘한 것까지 매도하는 것은 한국인의 아주 더럽고 치졸한 기질이 아닌가? 또 그러한 기질에 반대하고 衆愚의 폭압에 항거하며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자를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에서 무채색으로 분류하며 회색 분자, 기회주의자로 취급하는 그들은 너무나 더러운 한국인의 기질에 충실한 '참한국인'인가?


잘한 것은 잘한 것대로 인정하고 못한 것은 못한 것대로 비난하라. 고경태 당신은 새까맣게 어린 나보다 못한 편협하고 무지몽매하기 짝이 없는 무능한 기자이며 당신의 회사의 컬럼 페이지에 감히 커버 스토리를 쓸 자격조차 없는 가증스럽고 역겨운 전형적인 어글리 코리언이다.


당시 우리에겐 선택의 폭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제3세계로서의 한국(많은 이들은 한국이 제1세계라 착각한다.)은 '도덕성을 지키며 앉아서 굶어 죽어갈 것인가'와 '한순간만 눈을 질끈 감고서 제 발로 걸어온 성장의 기회를 잡을 것인가' 둘 중 하나만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참전 이전의 한국은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여느 나라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가난한 나라의 백성일 뿐이었다. 그러한 나라의 독재적 통치자, 아니 민주적 절차를 거친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무엇을 선택했을지는 자명하다. 정말 그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인가, 그것을 선택한 이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빨갱이 출신의 반공의 화신이어서인가?

"3일을 굶어 보라. 못할 짓이 없다."

이것이 당시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답일 것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인터넷 속에서 지성인은 죽었다.

깊은 성찰 후에 진지하게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사람들, 지성인이다. (지식인과는 다르다. 지식과 덕을 갖춘 인물이 지성인이다.)

지성인들은 언제나 언더그라운드에 존재한다. 오버그라운드에서 지성인은 지식인을 당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독기를 품고 전광석화처럼 달려 들어 목덜미를 물고서 놓지 않는 치타 같은 지식인 앞에서 지성인은 언제나 한발 늦은 채 뒷처리나 하는 하이에나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성인들이 깊은 성찰 뒤에 피력하는 의견들은 일반적인 대중들, 지식인이 미쳐 보지 못한 부분, 보았어도 지나친 부분들이 많다. 지성인들은 언제나 온건하고 중도적인 입장에서 혜안을 찾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지성인들의 그러한 성향은 기회주의자, 회색 분자로 내몰린다. 타협을 모르는 지식인 계층은 처절히 헐뜯고, 프로파간다에 놀랍도록 충실한 소위 젊은 네티즌들은 그러한 주장이 불분명한 의견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흔히들 '망언'이라고 불리는 극렬 분자들의 폭로 뿐이다.

오늘 어느 극렬 분자가 폭로성 발언을 하게 되면 그 날 저녁 바로 인터넷의 세계는 들끓기 시작한다. 전여옥, 이부영, 조갑제, 최병렬, 노무현 등 망언의 단골 손님들은 저마다의 진영을 가지고서 돌아가면서 한 번씩 터뜨리며 편가르기를 선명히 하여 저마다의 진영을 키워 나간다. 이부영, 최병렬처럼 '어리석음'과 '지조없음'을 드러내다가 그 무능력함을 초월하지 못한 채, 세를 잃고 잊혀지기 시작하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조갑제처럼 잊혀질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는 골의 일부가 비어버린 듯 개념을 상실한 지식인도 있다.
그들 중에 지성인은 없다. 지식만을 가지고서 을 가지지 못한 채 지성의 영역을 건드리려하기 때문에 극좌/극우적 사고 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지식은 문외한이면서 만 가진 사람들이 있다.
지식이 없기 때문에 德만을 추구하며 德으로서 세상을 감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극렬 분자의 또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이비 기독교 신자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름인가? 자신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德을 추구하는 자신에게 무한한 면죄부를 스스로 부여하여 대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는 우회적 영웅심에 휩싸여 있는 듯하다.

시대는 영웅의 등장에 갈증을 느끼고, 90여일간 한 개인의 영웅적 투쟁은 그가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이라는 기치 아래 대중(소위 네티즌)을 하나되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루어 놓은 결과는 얼마인지 파악하기도 힘든 혈세의 낭비와 공기(工期)의 연장 그리고 먼 훗날 돌아가는 철로만큼이나 인상되어 매겨질 우리의 철도이용요금 뿐이다. 그가 진정으로 도룡뇽을 위해서 영웅적 투쟁을 한 것인지, 절 주변의 환경이 파괴되어 절의 신성함을 해쳐 시주금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투쟁인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 것이다.


지성인은 침묵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임에도 지성인은 침묵하고 있다. 회색분자라는 비난 속에 주목해 주지 않은 고독한 외침에 지치고, 그들을 매도하는 인터넷의 신조류 속에서 적응하길 실패하였으며 마침내 그들은 은둔을 택한 듯하다.

맞서기를 거부하고 숨어버린 그들은 비겁자인가? 꼭 목숨을 걸고 앞장서는 투사(鬪士)여야만 의인(義人)인가? 스스로를 헛되게 버리는 지성인은 지성인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스스로를 소중히 하지 않는 사람은 德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성인의 침묵은 옳은 일인가? 그것도 아니다. 대중은 언제나 無知하였고, 지식인들의 프로파간다 속에 휘둘리며 이미 그것에 고도로 길들여져 자신이 길들여지고 있음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무식(無識)하면 용감하다.' 어설픈 앎은 용맹함 이외에 다른 것으로 발현되는 경우가 드물다. 어설픈 앎을 지닌 자가 더 깊은 앎을 위해 정진하는 경우는 드물다. 인터넷 속에는 그 어설픈 앎을 지닌 자들의 용맹함이 맹위를 떨치는 곳이다. 그리고 그것에 감화되는 그보다 더 어설픈 앎을 가진 네티즌들이 떼를 지어 편을 가르는 전쟁터와 같은 곳이다.

참된 현자(賢者)들의 집단이 필요한 시기다. 집단이 필요하다. 고독한 영웅은 시대의 진정한 요구가 아니다. 어리석은 知者와 德者를 몰아내 버릴 賢者가 필요한 시대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자이툰 부대, 철군하라. - 임종인 의원

[2004년 12월 02일 이글루스 작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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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의 국회의원이 아르빌 방문 이후, 한국군이 미군의 들러리를 서고 있다는 폭탄 발언과 함께 철군을 공식 언급하고 나섰다. 그 동안 의사당 안에서 왈가왈부하는 일은 있었지만, 공식기자회견 가운데 직접 아르빌을 방문한 의원의 철군을 주장은 유난히 목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이 얘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놓겠지만, 나의 견해를 이야기해 보자면..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입법부 구성원의 행정부에 대한 반란표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내 견해로는 궁극적으로 미국을 압박하기 위한 한국의 국내적인 외교 카드 중 하나로서 나온 한국 정부의 카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임종인은 열린우리당 의원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컨트롤이 가능한 여당 의원이고, 직접 아르빌이라는 국회 의원으로는 쉽게 가기 힘든 '험지'로 파견되었다. [정치인과 행정관료는 세계 공통으로 '복지부동'이다. U.N.을 보라.]
그러한 활동을 한 여당 유력 인사의 철군 발언은 국내적으로 적잖은 파장을 일으킬 소지가 있고, 겉으로 보기에 한국의 정계에서 아르빌 파견에 대해 야당 뿐만 아니라, 여당에서도 사분오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는 이미 완전 철군한 스페인군과 내년 초에 철군을 계획하고 있는 이탈리아, 헝가리, 네덜란드, 폴란드 등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의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의 철군 소식에 안절부절하는 미국에게 파병 규모 2위의 한국군에 대한 여당의 갈등 소식은 어떤 면에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될 수 있다. 한국군의 파병에 조지 W. 부시를 비롯하여 예외적으로 직접 아르빌 군부대를 방문한 럼즈펠드 국방 장관, 한국에 직접 방문해서 담판을 짓기도 했던 現국무장관 콜린 파웰의 뒤를 이을 콘돌라자 라이스 국방정책 안보보좌관 등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음을 의미하고, 더불어 사실상의 가장 미국 말을 잘 듣고, 잘 듣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꼬봉 국가 한국마저 등을 돌렸다라는 사실은 국제적으로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있어서 세계 각국의 동의를 얻고 있다고 하는 '다국적군'으로서의 이라크 주둔군으로서의 미군의 이미지의 실추에 치명적일 수도 있다.
[이 부분에서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치적인 의미에서 최초 전쟁은 榮-美 양국의 開戰에 의한 전쟁이었지만, 후세인 정부 축출 이후 참전의 의미가 아닌 치안 유지를 위한 전투병의 파병은 정치적 의미에서 해당 전쟁에 파병국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냄과 동시에 영-미군의 활동을 평화유지군(PKO와는 다른 의미)으로서의 활동으로 인정하고 동참한다는 것이 된다. 엄밀히 말해서 군인에게 전투병, 비전투병 구분 자체가 웃긴다. 간호병도 총들고 싸울 수 있다. 군인은 모든 병이 전투병이다. 다만, 병과에 따른 그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파병 규모에서 상위 서열을 차지하는 각국들이 파병한 전투병을 철군하고, 영국마저도 국내 정치적인 부담에 의해서 감군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마당에 영국을 빼면 사실상 최대 파병국인 한국군의 철군을 둘러싼 국내적인 정국혼란은 부시 정부가 이라크 정국을 조기에 마무리 지을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는 한국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며, 파병 당시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제시 받은 조건[파병 당사국의 예산으로 파병군의 유지비를 충당]에 대해 재정적인 조건의 개선이나, 해외 미군의 재배치 계획[Global Posture Review on Defense]으로 인한 주한미군 지상군 감군 및 신속기동군화에 대해 시기적으로 늦추거나, 동북아에 한해서 제동을 걸 수도 있을 것이다. 신속기동군화는 미국 신보수주의 세력들의 중국의 군사 대국화 견제를 주목적으로 한 세계 전략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완전 제동은 불가능하지만, 주둔군과 신속기동군의 이원적 체제로 구성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미국이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전환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중국이 한국과 같은 미국의 꼬봉 국가인 동시에 성장 잠재력을 상실하지 않는 한, 여전히 미국에게 동아시아 국제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워낙 수준 낮게 놀고 있는 한국 대통령들과 제대로된 로드맵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 외교의 현실인지라 뒷꿍꿍이 없이 정말 파병 한국군의 철군을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정당 정치인, 게다가 여당의 정치인이 국제 관계와 정세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는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라면, 단순히 액면 그대로 받아 들여서는 안될 것이고, 또 액면 그대로 하기 위해서 발언을 해서도 안될 것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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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미-러 대리전이 되는 건가.

[2004년 11월 25일 이글루스 작성글]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낙선자 유쉔코의 지지자들이 야누코비치 대통령 당선자의 대통령 청사 진입을 막기 위해 청사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모습]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 미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내부의 여-야 진영에서 헐뜯기와 흠집내기로 극도의 혼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가진 지정학적 가치와 러시아에서의 우크라이나의 가치를 고려한 듯한 미국의 우크라이나 정치에 대한 적극 개입 시도[대통령 당선자 야누코비치에 대한 불승인 의사 표명]는 러시아 연방 공화국의 심기를 직접적으로 건드리고 있고, 뿌찐 대통령은 러 성향의 야누코비치를 지지하기 위해서 선거 기간 중에 우크라이나를 두 차례나 방문하는 열의를 보이는 등, 흑해 지역과 크림 반도에서의 지정학적 우위를 계속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형국을 취하고 있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 속에서 독립한 국가들 중 가장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어떤 면에서 한국과 비슷한 형국이다. 그들 스스로 그들의 정치를 결정하고 싶지만, 지정학적 가치로 인해서 그들의 자의적 판단이 액면 그대로 수용되지 않는 것과 같은 케이스인 것이다.
한국이나, 우크라이나 모두 중앙아프리카의 아무 곳에 처박혀 있었으면 미-러 등이 관심을 보일 리 만무하다. [우크라이나는 자원도 좀 있어서 좀 다를 수 있겠다.] 약소국의 비애이고, 국제 질서는 약소국 정부와 국민에게 그것을 감내할 것을 강요한다.


어쨌거나 선거는 혼탁 양상이다. EU 성향을 보이고 있는 유쉔코 낙선자 진영에서 부정 선거 시비를 들고 나오고 그의 지지자가 대통령 청사 진입로를 막고 맹렬히 저항하고 있으며, 그 배후에는 미국과 서방 진영의 암묵적 지지와 후원이 있다.

미국은 이미 테러 전쟁을 통해서 미국의 유일패권적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열세에 놓였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유일무이한 중동의 혈맹 이스라엘을 후원할 수 있는 새로운 괴뢰정부 수립을 눈 앞에 두기 시작했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거점으로 카자흐스탄, 투르키즈스탄, 파키스탄 등을 이용하여 러시아와 군사적 경계를 형성하는데 성공하였고, 이것에 러시아는 심각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이제 러시아의 국외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까지 서방 정부 건설을 위해서 정치적 압력을 가하고, 러시아와의 '냉전'이라도 불사할 듯한 입장을 견지함으로서 갈등의 소지를 키우고 있다.

물론, 지금 미국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가 가지는 지정학적 중요성과 뿌찐의 민주적 독재국가화 되어 가는 러시아의 행태를 고려하여 이 기회를 놓치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 확대 시기가 언제가 될지 모른다고 판단하게 될 경우, 우크라이나 유쉔코에 대한 직접적인 지지와 후원에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러시아로서 최악의 스토리로 전개가 된다면 흑해에서 러시아의 흑해 함대와 미국의 대서양 함대가 함포를 마주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으로서는 실패해도 우크라이나 신정부를 승인하면 그만인 손해볼 것이 없는 장사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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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광'이라 자칭하는 사람들

[2004년 11월 06일 이글루스 작성글]


나는 나 자신의 정체성을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 속칭 '네오콘')에서 찾는다.

매스컴에서는 네오콘을 '전쟁광'이고,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지식 집단'으로 매도하지만, 그런 인본주의적/이상주의적 가치관에 젖은 'No War'라는 사고에 젖은 이들의 무지랭이 꿈을 쫓는 발상따위는 애초에 아무런 대안도, 현실적 탈출구도 제공할 수 없고, 현실을 현실로 파악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과 같은 '죽은 학문'에 불과하다.

게다가 많은 이들은 '신보수주의'를 전쟁광이라고 하는 매스컴의 그릇된 호도를 제대로된 지식을 갖추지 못한 채 먹여 주는 그대로 신봉하고 맹종하고 있다. 정작 그렇게 신보수주의를 전쟁광이라 매도하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신보수주의의 정치철학적 기조와 그들의 대표적인 사상가, 이론가들의 정치적 성향이 어떠한 것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대단히 의문점을 표시하고자 한다. [Irving Kristol, William Kristol, Richard Perle, David Prum, Paul Wolfowitz, Donald Rumsfeld, Dick Cheney, John Bolton 등의 American Enterprise Institution 출신과 학계의 인맥들을 통해 이루어진 이들의 정치 사상에 대해서 '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을 사랑하는 미국인'이라면 알면 알수록 매력을 느끼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미국의 신보수주의는 강대국의 신보수주의이고, 약소국은 약소국의 신보수주의적 사고가 있다. '신보수주의 = 전쟁광'이라는 사고는 지극히 단편화되고, 無知 를 바탕으로 발현되는 무책임한 평화론자들의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말대로 신보수주의가 '무차별적 전쟁광'이라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 그치지 않고, 이란,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프랑스, 시리아, 중국 등과 일전을 벌이는 대규모의 전쟁을 펼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신보수주의자들은 위의 열거한 국가들을 '적성국' 내지는 '잠재적 적성국'으로 내부 분류하고 있으며, 해외주둔군재배치 계획(GPR)은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되고 있다.

전쟁은 오히려 민주당 정권-존 캐리-이 대북 공습이 이뤄질 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다. 민주당 정권의 근래들어 가장 온건한 정책 결정자였던 빌 클린튼조차도 1994년 북한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계획하고 동해상에 태평양 7함대 소속 항공모함 2개 선단을 실전배치한 바 있다. - 당시 카터 前대통령이 대통령 특사로 파견되어 김일성과 담판을 지어 전쟁을 막았었다.]


'내가 생각하는 전쟁광'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나는 언제부턴가 스스로 '전쟁광'이라 칭하면서 양차에 걸친 세계 대전의 자료를 모아서 그것을 유희의 문화로서 즐기는 이들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얄타 회담의 세 정상, 과연 우리 중 얼마나 얄타회담의 정치적, 역사적 의의를 파악하고 그 결의문이 가지는 의미, 저들 삼인의 정치적 성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저들에게 전쟁은 무엇인가?' 라는 것은 언제나 나 스스로 반복하게 되는 진지한 물음이었다.
그들의 상당수는 '나치의 추진력 있고, 세계 정복이 가능했던 독일''꿈의 국가 바이마르 공화국', 그리고 최신예 무기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던 당시의 '전쟁 물자의 풍년'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적으로, 실증적이고 사료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선배 전쟁광'들이 모아 놓은 부정확한 정보를 근거로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나, 연합군의 브레스덴 불기둥 사건 등에 의한 '성과'나 전쟁중이라는 '戰時 그 자체만의 상황'을 놓고서 국제 정세를 파악되고, 분석되어진 '선배 전쟁광'들의 군사적 지식을 토대로 새로운 부정확한 지식을 재창조하고 재확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에르빈 롬멜이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였다면 독일 세계 정복[당시 세계는 유럽에 국한된다. 유럽 이외의 지역은 거의 식민지 상태였다.]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주장[이것은 내가 읽었던 2차 대전과 히틀러 관련 서적에서 자주 등장하는 논리였다.]이나, 양차 대전 참전의 배경에 너무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정치적 상황을 오랜 시간 보이며 차곡차곡 그 배경을 만들어온 재정 러시아와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적 역사적 배경을 너무나 단편화된 적군, 백군의 갈등 정도로만 해석하거나 하는 식의 주장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그럴 듯하고, 옳은 듯하게 느껴지지만, 조금만 배경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보게 되면 숱한 반문과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흥미거리와 동경의 대상으로서의 전쟁 물자(사진은 티거-I), 누가 진정한 '전쟁광'인가?]


그것은 마치 한국인들이 한국 분단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한국 분단의 결정적 단초였던 냉전의 시작을 언제부터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냥 두리뭉실하게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서 섣불리 현상을 '현재의 시각'에서만 판단하고 그것을 의사로서 표현 것과 같다. 그리고 그러한 오류를 더욱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러한 문제들은 정부 차원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일방적으로 해석된 지식'을 정규 교과서나 대중들에게 무책임하게 퍼뜨리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최근 동북 공정 과정에서 한국의 영토 문제가 거론되어 한 방송사를 통해서 'U.N.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한 한국의 영토의 영역'에 대한 의미가 불분명한 애매모호한 해석에 대해서 '거의 처음으로' 국내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된 적이 있다. 나와 나와 비슷한 분야의 학문을 배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정치사' 또는 '한국외교사' 시간에 이에 대해서 자세히 배웠을 것이지만, 그것을 남에게 말하기는 무척 버거운 현실에 직면했을 것이다.
[우리 한국 사회는 남과 다른 주장을 펼친다는 것이 그토록 힘에 부친다. 어지간하게 말빨 없고, 실력이 안되면 다수가 떼로 몰려와서 욕짓거리를 해대면 제 풀에 지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


전쟁광이란 반드시 전쟁을 수행해야 '전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행해야 하는 '불가피한 전쟁'이란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라크 전쟁이 불가피한 전쟁이었는가?"

[약소국 외교는 선택이 지극히 제한되기 마련이다. 그러한 제한을 거부하고, 강한 세력에게 거스르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리스크는 충분히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정책 결정자로서 올바른 선택이 아니며, 국민의 안위를 담보로 모험주의적 외교 정책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이미 역사적으로 모택동을 통해서 증명된 바 있다.]


..라는 주장은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라크 전쟁 이전의 중앙 아시아 지역의 세력 판도와 이라크 전쟁 수행 이후의 중앙 아시아 지역의 세력 판도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미국에게 이라크 전쟁이 왜 불가피한 전쟁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단지, 기존의 빌 클린튼 정권은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과 경제 부흥 위주의 정책들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에 대해서 '세계 유일 패권국으로서의 권리와 요구'를 제대로 행사하지 않았을 뿐이고, 그것은 미국이 언젠가는 행사하게 되었을 것이며, 단지 그것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고 추구하는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시대에 파생되었으며, 그 사건의 발단은 전세계의 지탄을 받은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행위였다.



"9.11 테러는 미국의 이스라엘의 야만적 행위의 지원과 두둔을 통한 결과가 아닌가?"

['9.11테러'는 전쟁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전통적 보수주의자' 조지 W. 부시를 '신보수주의자'로 만들었고, 그와 그의 국민들로 하여금 開戰을 두려워하지 않고 '피의 응징'을 갈망하게 '애국주의' 사조를 만들었다. 약소국의 비애에 대해 국제체제에 순응하기보다, 저항하기를 선택한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 구축함 폭탄 테러와 9.11테러 등의 직접적인 무력 도발을 감행하였고, 이러한 오사마 빈 라덴의 외교적 선택(현대 사회는 영향력 있는 개인의 행동도 외교적 행위가 될 수 있다.)은 지옥의 문을 열어 버리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라는 주장은 매우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오사마 빈 라덴이 미쳤다고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많지도 않은 자기 전투 조직원들을 그렇게 죽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부하 한 명, 한 명의 목숨도 아까운 게릴라 조직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들의 무차별적 도발 행위는 분명 그 근원이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미국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그나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이 이스라엘 하나 뿐이고, 手足국가였던 사우디 아라비아도 서서히 미국의 의지와는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하기 시작한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사우디 아라비아를 '잠재적 적성국'으로 분류하고 있음을 유념하자.]
미국에게는 사실상 중앙 아시아 지역에 직접적으려 영향을 줄 수 있는 국가는 이스라엘 뿐이고, 그 이외에는 변방 지역의 이집트[駐이집트 미국 대사관에는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1000여명의 외교관을 본토에서 직접 파견해 놓고 있다. 이는 한국의 외교통상부 직원 전체의 2/3에 해당하는 숫자이다.]에 불과하다. 이라크 전쟁 수행 이후, 중앙 아시아 지역은 사실상 미국의 꼬봉 국가들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가장 극렬하게 미국에게 반기를 들던 리비아의 카다피마저 핵개발을 포기하고, 미국에 투항함으로서 생존을 택했다.] 이는 미국의 이익에 극히 부합되는 미국을 위한 패권적 신보수주의를 행사하는 미국 신보수주의의 최선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도, 오사마 빈 라덴도 누구도 '전쟁광'이 아니다. 모두 저마다의 명분이 있다.

나는 '전쟁'을 유희로서, 취미로서 즐기는 이들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가진다. 전쟁은 전쟁 그 자체로서 추모되어야 하고, 기념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유희가 아니다. 취미가 될 수도 없다. 전쟁은 단지 전쟁일 뿐이고, 많은 이들의 희생 속에서 태생한 '피의 역사'의 하나일 뿐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일본인 납치와 중동의 갈등

[2004년 10월 29일 이글루스 작성글]


위협받는 인질 앞에 잔인한 일본 국민


[내일신문]
이라크무장세력의 자국 인질에 “개인 잘못에 국가 책임없다” 냉담


개인보다는 국가를 우선시하는 일본의 국민의식이 또다시 나타나고 있다.

이라크 무장세력은 26일 일본인 고다 쇼세이(24)를 인질로 붙잡고 48시간 내에 이라크 남부 사마와에 주둔하고 있는 자위대의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27일 자위대는 이라크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인질의 살해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인질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생존에 대한 걱정보다는 “위험지역에 입국한 인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일본 정부와 국민들 사이에서 높아지고 있다.

“자아발견 여행을 떠나고 싶다.”

이라크 무장세력에게 구속된 고다씨는 친구에게 이와 같이 말하고 해외여행을 떠났다. 여행목적지는 치안이 악화돼 여러 차례 출국권고가 내려진 위험지역 이라크였다. 고다씨가 선택한 이라크는 치안이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할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고다씨는 “프로복서가 되고 싶다”며 고등학교를 2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도장회사와 다다미 가게에서 일하며 여행비용을 모아두고 있었다. 올해 1월, 그는 일하면서 돈을 벌어 여행하는 ‘워킹 홀리데이’ 제도를 이용해 뉴질랜드에 갔다.

출발 전 중학교 동창회에서 고다씨는 “뉴질랜드에서 홈스테이로 머무른 뒤 워킹 홀리데이로 세계각지를 여행하고 싶다”며 자신의 계획을 기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고다씨는 지난 21일 이라크에 입국했다. 입국 정보는 요르단 암만의 한 호텔에서 외무성으로 전해졌다. 외무성은 출국권고를 전하기 위해 부친과 연락했고 출국을 서둘러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마치무라 노부다카 외상은 “왜 이런 여행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고다씨의 행동을 비판했다.

프리카메라맨 미야지마 시게기(43)씨와 가노 아이카(34)씨는 지난달 27일부터 이번달 4일까지 자위대를 취재하기 위해 사마와에 머물렀다. 그들은 밖을 걸어다닐 때 “밖에 나오면 유괴된다”, “일본인은 팔면 비싸게 받을 수 있다”는 등의 주의를 받았다고 지적했다.

작년 1월 사마와를 방문했을 때에는 시내 중심부를 걱정없이 걸어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동중 아바야(옷감)로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안됐다. 경호비용도 한달에 310달러에서 1일에 100달러로 급상승했다.

올해 5월 바그다드 근교에서 총격으로 차 안에서 사망한 하시다 신스케(당시 61세)씨와도 친했던 미야지마씨는 “이라크는 절대 여행지로 적당한 곳은 아니다”라고 고다씨의 행동을 비판했다.

‘개인의 잘못된 행동을 국가가 책임질 수 없다’는 일본인의 의식은 부모에게 용서를 강요했다. 고다씨의 아버지 마스미(54)씨와 어머니 세쓰코(50)씨는 27일 “이라크에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많은 분들에게 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이날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고다(아들)는 이라크의 상황을 지켜보며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려고 했을 것이다. 꼭 살아서 해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대웅 리포터 gbear@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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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가 다소 찝찝(?)한 내일신문이라는 곳이지만, 기사 자체는 크게 하자가 없어 보이기에 그냥 몇 글자 끄적여 보고자 한다.

이 뉴스의 취지는 일본의 국가주의적 가치관을 비꼬고 싶은가 보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가장 이성적이고 냉정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사건에 오히려 국가 내부적으로 호들갑을 떨고, 구해내라고 난리법썩을 떠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반복적인 해당 국가 국민의 납치나 살해를 초래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돈이 된다는 가치 판단만 서버리면 얼마든지 유사 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 특히, 필리핀 같은 어리석고 멍청한 대중주의적 정부따위나 저지를 듯한 단기적 안목에서 행해진 과오를 일본이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이 매스컴은 일본 정부가 '고다'라는 사람에게 수차례 중동 특히 이라크 지역이 여행으로 부적절한 곳임을 지적하였고, 국민들이 그러한 행동에 '고다'라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그것을 '비정하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의 가치 판단에 이것은 국가주의적 가치관이 아니라,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좀 더 심화된 형태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누구나 자신이 누리는 행동의 자유만큼, 행동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한 자유와 의무, 책임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된 근간이며, 당연한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국의 김선일 사건과 유사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는 완전히 손놓고 불구경하듯이 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것 또한 옳지 않다. 국가는 그들의 해외 국민들에 대해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비록 그가 국가가 위험하다고 지적한 권고를 무시한 채 독선적이고, 방만한 행동의 결과를 통해서 이러한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 하더라고 하더라도, 국가는 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그 국민은 자국에서 납세를 비롯한 여러가지 의무를 수행해 왔다.]

하지만, 그러한 국가의 역할 가운데 필리핀과 같은 선례는 매우 좋지 않은 경우라고 말하고 싶다.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 필리핀의 경우는 매우 인본주의적이고, 국가가 국민 개개인의 안전을 위해서 헌신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러한 당장의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 국제 외교적으로 결정된 사안을 손바닥 뒤집듯이 손쉽게 파기해 버리는 필리핀 정부의 행동은 국제적으로 필리핀 정부의 신뢰도에 크나 큰 상처를 입힐 소지가 있고, 차후의 유사한 상황에서도 필리핀 정부는 비슷한 방법을 통해서 소수의 게릴라 집단으로도 통제해 나갈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꼴이 되었다.
[미국은 이미 중남미 지역에서 직간접적으로 미해병대를 투입하거나, 해당 국가의 테러리스트들을 직접 육성 또는 후원하여 해당 국가를 자신들의 의지에 맞게 바꿔나간 선례가 있다. ex.니카라과, 아이티 등]

테러리스트들의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 한, '고다'라는 사람은 비극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짙다. 테러리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활동 방향을 좀 더 현실적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오늘날 국제 사회에서 필리핀처럼 머저리 같이 자기 나라 국민 몇 명이 납치되었다고 해외 파병 군대를 철수시키는 나라는 찾기 힘들다. 그리고 테러리즘 또한 국제적으로 지지 받는 행위가 될 수 없다. 무력은 더 큰 무력을 부를 뿐이다. 테러리즘이 가지는 무력의 크기가 세계 유일의 단일 패권 국가 미국이 가진 무력에 비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는 것을 그들은 그들의 헛된 종교적 믿음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나는 테러리스트들과 그러한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을 동정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 그리고, 조지 부시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고자 한다.
조지 W. 부시의 테러리즘과 테러리스트들의 테러리즘은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인가?
왜 한 쪽은 일방적으로 비난 받아야 하고, 왜 한 쪽은 일방적으로 동정받아야 하는가?

저항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국의 일제 식민지 시절을 볼 때, 해외 투쟁세력(팔로군 등으로 거의 대부분 북한에 흡수되었다.), 국내 계몽세력(오늘날 닫힌너거당 녀석들이 '친일파'라고 불리는 세력은 대부분 이들이다.), 해외 외교세력 등의 여러가지 방법이 있었고 결국 최종적인 승자(?)는 해외 외교세력이었다. (이승만, 김구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중동 지역의 종교적 믿음에 도취된 단세포 인간들은 오로지 투쟁부터 시작하고 나서 외교적으로 활동하는 지적 활동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중동은 깨어날 필요가 있다. 지금 이대로의 중동은 이라크 전쟁이 끝나도 또다시 반목이 계속될 것이다. 지금의 중동이 과연 단순히 석유 때문에 패권국들의 갈등을 초래하는 것인가? 중동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석유로 돌리면서 정치적 면죄부를 받을 생각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PeterGabriel™, Against All Odds..

"한미관계 수평 이룰 준비됐나"

[2004년 09월 27일 이글루스 작성글]

Link : 힐 대사 "한미관계 수평 이룰 준비됐나"


“노무현 대통령이 ‘이제는 미국에게 할 말을 좀 하는 사이고 이 같은정책을 지속하면 대등한 관계가 될 것’이라고 말한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미관계는 상호존중과 공동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나는 미국이 ‘빅브라더’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고 미국이 정말 한국과 수평적 관계를 정말 준비가 됐다는 듯이 기사를 쓰는 보도 태도 자체가 이 기사를 쓴 기자의 외교적 활동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의심스럽다.저런 관례적 답변에 이렇게 들뜨는 모습이라니..

노무현 정권 들어와서 저지른 對美외교의 실책과 노무현의 개인적 실책, 미국에 가서 받은 노무현의 홀대(비슷한 시기에 갔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현격하게 비교대는 대우와 일정)와 주한 미군 1개 사단이 빠져 나가는 것에도 이토록 벌벌 떨어야 하는 한국의 국제 정세와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력에 추풍낙엽처럼 휘날리는 국력으로 어떻게 세계의 절반인 미국과 수평적 관계를 이루겠다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아니, 그보다 미국이 과연 세계 어느 나라와 수평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부터가 궁금하다. (미국의 큰형님 국가 영국도 사실상 미국의 가장 우호적인 꼬봉 국가 중 하나가 아닌가?)


민족의 자주성과 자존심을 내세우는 수많은 시민 단체들과 민족주의 노선의 정당, 사회 단체들은 對美외교의 수평적 입장 견지와 민족적 역량 강화에 의한 자주 국방(이나마도 얼마 전에 몇 대 얻어 맞고 나서 혼자서는 안되는구나.. 싶어서 '협력적 자주 국방'으로 격을 낮춰서 자주 국방을 주창하고 있다.)을 외쳐대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당신들이 모든 것을 원상 복귀시킬 능력이 있는가?"


한국 사회는 민주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오랜 군부 독재에서 벗어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마치 4.19 이후의 장면 정권이 들어서면서 있었던 혼란과 유사한 '제 목소리 가지기' 노력이 과부하가 걸려서 '협력'과 '공조'라는 단어를 상실한지 오래된 느낌이다.

정당들은 정당대로 외곬수의 사고 패턴에 사욕에 눈이 멀어 국가적 규모의 장기적 플랜 제시나 당면한 현안에 대한 해결에는 관심이 없고, 노사는 노사대로 전근대적인 군부독재식의 '밀어 붙이기'가 익숙해서 타결보다 일단 파업부터 시작하고, 사용자 쪽에서는 무조건 버티기로 일관하면서 국민을 볼모로 정부와 언론의 지원을 받아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고 한다. 비 정부 단체(NGO, 시민단체)들은 그들대로 초심을 상실한 채, 그들의 커리어를 정치판으로 나서기 위한 발판 정도로 생각하고 명함 내밀기에 급급하고, 그렇다 보니 빨리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자극적인 소재가 필요하게 되고, 對美관계에 대한 앞뒤 생각 없이 민족적 자주성을 구호로 내세우는 것은 흔히 말하는 '듣기 좋은 소리로 대중을 유혹하는 사리사욕에 눈 먼 악의적 권력자의 유충'일 뿐이다.


우리보다 더 많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독일은 우리보다 민족적 자주성이 약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주 국방하자는 소리는 입도 뻥끗하지 않는 독일인들이 과연 우리보다 자주성이 부족한 나라 국민들인가?

냉전이 종식되고, 독일이 통일되어도 독일은 주독 미군의 감축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강자를 통해서 실리적인 이익을 챙기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유럽이 통합의 길을 걷고, 러시아의 위협이 거의 사라진 지금에서도 '만약의 사태'라는 것에 대한 보험의 차원에서 미군을 주둔시키며 언제든지 미군이 자국의 문제에 직접 관여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일본은 수십년 동안 오키나와 섬 전체를 미해군의 기지로 할양하다시피 하고 있고, 지금은 오히려 주일 미군을 본토로 옮기려고 노력중이다. 일본인들은 우리보다 자주성이 부족한 민족인가? 그들은 식민지 근성의 국민들인가? 막말로 식민지 근성이라는 것은 우리 한국이 일본보다 더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섬나라 왜국의 국민들은 왜 주일 미군을 본토에 들여다 놓으려고 안달인가? 무작정 대책없이 미군을 쫓아내는 것이 자주 국방인가? 민족의 자주성 회복인가?

한국에는 한 대도 없는 항공 모함이 일본에는 실전 배치된 것만 2대가 있고, 2대를 현재 제작중이다. 한국에서는 3000톤급 구축함 만들고 좋아하고 있지만, 일본은 미국과 일본 밖에 가지지 못한 이지스 체계의 순양함이 있다. 자주 국방을 하자고 외치자면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고, 일본은 과거 1~2차 대전 당시 전쟁 당사국으로서 우리보다 훨씬 큰 규모의 대규모 전쟁을 치른 경력이 있고,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핵재처리 플루토늄 3000여톤은 6개월 이내에 핵무기로서 실전배치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주일 미군을 본토로 끌어 들이려 하고 있다.


주한 미군과 對美관계는 자주성과 민족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다.
옛부터 민족자존심을 강조하다가 망한 나라가 어디 한둘이더냐? 사투리 중에 우스갯소리로 "유도리 있게 살아남아야 한다." 라는 말을 한다. '옹고집처럼 아집을 부리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고 바르게 처신하라.' 는 의미다.

1차 대전 직후 중남미 주요 국가들은 1차 대전의 참화 속에서 최고의 호황을 누리며, 세계적인 선진국 대열에 다수 합류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된 정책과 무지한 국민들, 어리석은 지도자를 둠으로서 국운이 기울었고, ISI(Import Substitution Industrialization)와 같은 치명적인 착오를 택함으로서 오늘날 貧國의 대열에 당당히(?) 합류하게 되었다.


'이제는 미국에게 할 말을 좀 하는 사이' 가 되고 싶다고?
그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꼴이 어떤지부터 알자.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라는 것은 국력이 비슷한 국가들끼리나 논하는 이야기다. 미국한테는 우리 나라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우리는 미국 없으면 나라 망하지 않을까를 염려해야 하는 입장이다.

현대 사회에 와서 미국과 수평적 관계를 '잠시나마 유지했던' 국가는 소비에트 연방 뿐이었고, 그나마도 쿠바 사태 이후로 주도권을 미국에게 넘겨주게 된다. 쓸데 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다가 국가의 운명을 멸망의 그늘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길을 택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한국은 틀림없는 '상대적 약소국' 이다.
약소국 외교'대안적 정책'이 존재할 수 없고, 한 번의 외교적 실패는 국가의 존망을 약육강식의 국제 사회에 내던져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국가의 안보에는 0.01%의 위험적 요소도 두어서는 아니된다. 단 1%의 위험이라도 존재한다면 위정자와 정책 결정자는 그 선택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100번의 위기를 넘겨도 1번의 실수를 하게 되면 약소 국가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된다. 민족의 자존심과 자주성이 약소국의 외교에서는 반드시 개인적인 관계에서 오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스스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 국가와 국가, 정부와 정부가 마주 보는 국제 사회에서 이론적이고 원론적인 수평적 대외 관계라는 것은 한낱 허망한 일장춘몽일 뿐이며, 그러한 것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나라를 포함한 많은 약소 국가들은 지금 미국이 안고 있는 국제 사회의 주도 국가(차마 '지도자적 국가' 라고 호칭하고 싶지 않다.)로서 지녀야 하는 여러 가지 의무와 책임들(미국이 그것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비난이 많으나, 확실한 것은 미국은 인류 역사상 그 어떤 패권적 지위를 누렸던 국가들보다 선량하고, 그들이 주창한 세계경찰국가로서의 역할을 비교적 잘 수행해 오고 있었다. 조지 W. 부시 시기의 9.11 테러 이전까지는..)을 우리 한국도 미국과 동등한 수준으로 분배 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과연 우리가 감당해낼 수 있는가? 고작 3000여명을 전쟁터 중에서 가장 교전이 적은 지역(전쟁터에서 안전한 지역을 찾는다는 우리 정부의 발상 자체가 내게는 3류 개그일 뿐이다.)에 배치되는 것에도 온 나라 국민들이 들고 일어서는 밴댕이 만한 속으로 소말리아 같은 지역에 얼마나 파병을 할지 모르겠다. (미국은 자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전쟁에도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일정 수준의 병력을 파병은 했었고, 참패한 이후 퇴각하였다.) 그들이 지고 있는 부담을 우리가 질 자신이 없거나, 질 마음가짐이 되어 있지 않다면 적어도 태클은 걸지 말자.


이것이 '쓸데 없는 두려움'과 '경외감', '사대주의' 등으로 해석되는가?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대책은 가지고 있는가? 그 대책들이 혹시 국민의 고혈을 짜내는 지금의 머저리 같은 노무현 행정부의 세금 인상과 6% 순채무 국채 발행은 아닌가? 한국이 민주화된 이래 역사상 최초로 순채무 예산을 짜낸 양반이 바로 노무현이다. 그 빚까지 지면서 하는 짓이 수도 이전과 자주 국방이다. 참으로 병신 같은 놈이 아닐 수 없다. 그 돈의 1/10만 있어도 주한 미군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대도 노무현의 멍청한 머리에서는 자주성과 자존심을 내세움으로서 국내적인 정치적 홍보 효과와 수도 이전을 한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공명심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멍청한 지도자를 뽑은 멍청한 국민(그 안에는 나도 포함이 된다는 사실에 치가 떨린다.)을 탓해야 하나, 멍청한 지도자답게 병신/등신 짓만 하는 노무현을 탓해야 하나?

아니면 둘 다 '등신'인가?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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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스 안보보좌관의 사과 전화

[2004년 09월 10일 이글루스에서 작성한 글]


시연설 한국 우방국 누락 라이스보좌관 사과전화




[한겨레]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9일 저녁 권진호 국가안보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어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일 공화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우방국들을 열거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빠뜨린 데 대해 사과 뜻을 전달했다.
라이스 보좌관은 이날 권 보좌관과의 통화에서 “이는 전혀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미국은 한국의 기여를 중요하게 평가한다”고 말했다고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이날 통화는 라이스 보좌관의 요청으로 저녁 7시45분부터 10분 동안 이뤄졌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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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기사의 이면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이면에 담긴 이야기를 서술해 보고자 한다..



우선 핵심 우방국(Key Ally) 일본과는 다른 등급이면서 더 낮은 등급인 가치 있는 민주적 우방국(Valued Democratic Ally) 분류된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간접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사과의 사례이다.


실제적으로 나의 판단에서 한국은 분명히 실질적이고, 중요한 Key Ally 급의 가치를 지닌 국가이며, 또 실제로 Key Ally 급에 걸맞는 역할을 미국의 세계 전략적 차원에서 수행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역사적으로는 '붉은 세력(공산주의 진영, 제2세계)'과 국경을 맞닿으며, 몸으로 공산주의를 막은 민주주의의 서태평양 방파제였으며, 미국의 동아시아 최후의 거점인 일본을 수호하기 위한 방패막이 역할과 '일본 성장의 먹이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왔다. 또 냉전이 종식된 21C의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는, 장기적으로 중국의 성장과 팽창을 군사적으로 견제할 전진기지로서 역할하기 위해 '해외주둔군재배치계획'(Global Posture Review)의 일환으로 주한 미군의 새로운 역할에 걸맞는 작전 환경을 충실히 제공해 주고 있으며, 더이상 주한 미군을 '인계철선'으로 활용하는 만행(?) 또한 저지르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북한은 주한 미군의 후방 배치를 더욱 더 두려워하고, 맹렬히 비난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보이고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부시 행정부 하에서의 미국에게 북한은 이미 '적'으로서의 부담감을 많이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는 한국의 민주화를 수호하고, 악의 제국[Evil Empire 는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와서야 나온 말이지만..]의 침략으로부터 우방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서 전비의 99% 가까운 비용을 들여서 마치 '자기네 전쟁'인 양 뛰어들어 지켜낸 땅이기도 하다. [영천군 옥계리에서 백마고지 참전 군인 중 유일한 생존자이셨던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는 참으로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한국 전쟁에서 한국군의 역할이란 것은 실질적으로 미군의 원조 없이는 정말 미미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오늘날도 탄피마저 줍는다. '탄피를 개조해서 실탄을 만들까봐..' 라는 변명은 사냥용 총기/엽총 소지가 왠만해선 저지 받지 않는 오늘날의 한국에서 참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다. 우린 연발로 한 큐에 탄창을 갈겨댈 만한 능력이 못되는 것은 엄연히 인정해야 된다.]



한국은 이래저래 미국의 Key Ally 에 포함될 이유가 충분하고, 자격 또한 충분하다. 그러나 한국은 단지 '가치 있는 민주적 우방국'으로 분류되었을 뿐이다.
자신들의 큰형님이고, 피를 나눈 형제 국가인 영국 다음으로 많은 3600명이나 死地나 다름 없는 이라크로 떠나 국제적으로 땅에 떨어진 미국의 위신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어 주었지만, 미국이 한국을 바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냉랭하고, '아랫 것'을 보는 듯하다. 물론, 미국은 모든 나라를 '미국보다 못한 국가'로 인식하고 있긴 하지만 한국이 받는 이러한 대우는 참으로 부당하지 않을 수 없다. 왜 한국은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인가..


잠시 화제를 바꿔서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 수석보좌관[개인적으로 이 사람에게 관심이 좀 많다.]의 사과 전화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외교적으로 조금이나마 땅에 떨어진 한국의 위신을 '국내적으로나마' 세우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수석보좌관의 '사과 통화'에 몇가지 불만점과 의문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먼저 불만점은 당연히 백악관 대변인의 공식 기자 회견을 통한 부시 대통령의 사과 친서 낭독 또는 조지 w. 부시의 직접적인 사과가 아닌, 라이스 보좌관의 비공개적 전화 통화를 통한 사과라는 것이다.
전화 사과라는 것은 그냥 라이스 보좌관이 백악관이나, 자기 사무실 등에 앉아서 부시 대통령의 명령을 하달 받아 그냥 전화 한 통화를 하면서 "우리 대통령이 너거 나라한테 미안하단다. 미안하다. 알아 들어라." 하면 끝이다. 그 전화 통화를 미국이나 외신 기자들이 우르르 모여서 옆에서 들으면서 받아 적는 것도 아니고, 韓-美관계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언론이라면 미국내 메이저 매스컴들이 조지 W. 부시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때와 같이 브레이킹 뉴스로 전달할 리도 없다. 아니, 아예 자막 기사조차 언급되지 않을 가능성마저 충분하다.

그냥 그대로 묻혀 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을 바라보는 미국의 눈높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고 말았다. 미국에게 한국은 그냥 대충 전화 한 통화로 미안하다고 하면 '그거 한 통화 받아 먹고 떨어져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실질적으로 하는 것은 그들dl '핵심 우방 [Key Ally]' 이라고 부르는 일본과 대등하거나, 어떤 면에서 더 막중한 책임을 수행하고 있는데, 대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라이스 국가안보수석보좌관은 부시 행정부에서 대단한 실세 중 한 명이고, 現부시 행정부의 중요 요직에 앉은 사람 중 한 명으로서 그를 통한 사과 의사 전달은 나름대로 격식을 차린 것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한국은 이런 정도의 격식에 헤헤~하면서 먹고 떨어질 그런 수준의 우방국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난다.

[여기서 잠깐.. 한국인들 다수가 참으로 큰 오해를 하는 점이 있는데, 미국은 '동맹국'이란 것이 없다. 미국은 절대 '동맹'을 맺지 않는다. 동맹이라는 용어가 붙는데는 '자동개입조항'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와도 자동개입조항이 첨가된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적이 없다. 즉, 빠져나갈 구멍을 얼마든지 만들어 둔다는 것이다. 미국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지만, 미국은 미국 스스로 밝혔듯이 미국의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참전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의 '우방국'이지, '동맹국'이라고 부르기엔 약간의 '의도적(정치적 목적을 띤) 의미 확장'과 무리가 따른다.]



라이스 국가안보수석보좌관의 전화를 통해서 생기게 된 의문점은 조지 W. 부시의 '한국누락 연설사건(?)'은 진정으로 '부시 대통령의 실수'일 가능성이 일부 감지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순수하게 나의 견해일 뿐이다.]

우선 지금 현재 시국은 11월 미국 대선을 바로 코 앞에 둔 시점이고, 부시와 캐리는 현재도 박빙의 승부이며, 처음으로 오차 범위 이상의 격차로 부시가 존 캐리에 지지도가 앞서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11월 선거가 끝나는 순간까지 가야 가능한 이야기이다.
게다가 現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전쟁의 전황 악화[부시는 종전을 선언했지만, 이라크가 전쟁 중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는 바보이거나, 정보의 맹아(盲亞)일 것이다.]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을 안고 있다. [나는 이라크의 이슬람 테러 세력이 미국 대선 직전을 기해서 부시의 득표에 큰 부담을 주기 위한 대규모의 연쇄적 테러 행위를 감행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 본다.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스토리라 본다.]

이런 중요한 시국에서 정교하지 못한 대외 연설과 언행으로 수없이 구설수에 오르내린 부시의 연설 대해서 또다시 메이저 매스컴의 구설수에 오르내린다면 오늘날 한국에서 '등신 노무현'이 맨날 깨지는 것처럼 또 한 번 캐리 진영에게 작으나마 역공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고,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것과 같은 형국인 부시 진영에서는 이러한 작은 꼬투리조차 잡히고 싶지 않은 심정일지도 모른다. 부시 그 자신도 캐리 후보의 아주 작은 군 시절의 흠을 꼬투리 잡아서 엄청나게 씹어대면서 지지율을 역전시키지 않았는가..

그런 점에서 그의 대통령 후보직 수락 전당대회 연설에서 한국을 누락시킨 사건은 진실로 사건이며, 부시는 그것에 대한 한국 측 내부의 반발 여론이 미국에까지 전달되기를 바라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대외적으로 노출은 최소화하면서 나름대로 관료의 급수는 맞춰주면서 넘어갈 수 있을 수도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라는 카드를 선택하기 위한 전략 구상의 시간 때문에 이렇게 늦은 사과전달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고 본다. [럼즈펠드 국방 장관 같은 좀 더 군사 방면의 고위직 관료를 쓸 수도 있지만, 럼즈펠드는 이미 지난 포로 문제로 지나치게 언론의 집중 포화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선례가 있다.]


다시 화제를 '한국의 전략적 가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당한 대우'로 돌려 보고자 한다.

이러한 한국에 대한 상대적으로 부당한 대우에는 어떤 점에서 그 동안 우리 정부가 정치적인 정통성의 부족으로 대대로 미국 대통령들에게 우리의 동그랑땡 선글래스 매니아, 두발 장애자, 물태우가 General Park, General Jeon, General Roh 등으로 불리면서 미국이 한국을 실제보다 더 후진국을 대하듯이 의식을 고착화시켰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통성이 부족했던 역대 우리 정권들은 미국의 요구에 베트남전의 참전 과정을 제외하면 대단히 수동적인 편이었고, 미국의 직접적 요구나, 국제 기구를 통한 간접적 요구에 지나치게 무력하게 항복한 선례가 너무나 많다. 또, 이러한 무기력함은 한국의 지리적 특성과 북한과의 무력 대치 상태라는 매우 특수한 국가적 상황에 기인하기도 하여 추후 등장하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의 민주적 정권들마저도 수동적인, 미국의 입장에서 보기엔 '그가 가진 능력에 비해서 지나치게 컨트롤하기 쉬운 꼬맹이' 정도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는 역시 첫번째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국의 비굴한 외교, 일명 '등신 외교'도 일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한국은 미국/영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전투병을 파병하였으나, 우리의 '등신 노무현'은 마치 도둑 내쫓듯이 새벽녁에 다들 잘 때 소리소문없이 우리 젊은이들은 死地로 내쫓듯이 파병시켜 버렸다. 그것도 2차례씩이나..

아니.. '등신 노무현'은 파병하는게 죄를 짓는다고 생각을 한건가? 파병이 왜 죄를 짓는 건가? 파병을 통해서 이라크 내에서 강해질 우리의 입김과 외교적 지위가 얼마나 높은 부가적 가치를 창출할 것인데, 그것들을 국민들 다수가 생각해 주지 않는다고 그걸 마치 죄 짓는 듯이 숨어서 뒤로 빼돌리는 건, 멍청하고, 아둔하고 머저리 같은 노무현과 그의 등신 저머리 같은 보좌관들 말고는 누구도 생각치 못할 발상일 것이다. 이러한 소식은 駐韓 미국 대사관[본토 파견 외교관만 200명 이상이란 것이 정설이다. 고용된 한국 직원도 300여명에 이르는 대형 대사관이다. 반면 우리 나라 외교통상 인력은 전세계에 파견된 외교관을 전부 합쳐서 1800여명에 불과하다.]을 통해서 미국에 전부 보고되었을 것이고, 부시가 관심이 있었다면 분명히 읽어봤을 것이다. [나는 부시가 적어도 한국의 군대 파병 관련 보고는 읽어 봤으리라 확신한다.] 이러한 비굴한 '등신 파병'은 미국 행정부로 하여금 한국의 파병 의지와 한국 행정부의 자주성에 대한 깊은 의구심과 경멸감을 심어주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미국으로서는 우리 같은 파병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우리 젊은 피가 죽어나갈 곳으로 보내는데 그딴식으로 내보내다니, 미치고 빡돌아 버린 노무현놈이 아니면 누구도 감히 발상조차 不許하다.]


또 하나의 가정은 미국이 의도적으로 한국을 제외시켰을 가능성이다.
이 또한 가능성은 충분하다. 최근 한국과 미국은 GPR과 한국내에 팽배한 反美감정[이것은 국제정치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볼 때, '아주 마이너리티한 문제'일 뿐이지만, 분명히 언급해볼 만한 문제이다.], 노무현 정부의 파병에 대한 뜨뜨미지근한 입장과 現노무현 행정부의 외교 관련 라인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점[한국의 전통적인 '北美외교라인'을 노무현은 '개혁정치의 외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하여 사실상의 숙청을 단행했다. 한국의 외무부 장관이 연속해서 두 차례 대외 행사에서 같은 나라의 외교 담당 관료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만큼 단명한다.] 등에 대한 미국의 우회적이고도 직접적인 경고 메시지일 가능성 또한 아주 근거없는 소리는 아니라 생각한다.

미국의 이라크 파병 우방국 리스트에서 한국의 배제는 다르게 생각하면 '이라크 내에서 한국군의 존재를 인지하지 않겠다는 의미', 여기에서 한국군의 인지를 부정하는 것은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군사적 지원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 미군의 정보 지원이 없는 한국군 군사력의 전투력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車,包,象,馬 다 떼고 장기를 두는 것과 같은 현실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두렵고 경악할 예상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콘돌리자 라이스의 사과 통화는 최소한으로나마 부시 행정부가 한국 누락 연설에 대해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이것이 '전략적 누락'이든, 순수한 부시의 '무딤에서 오는 과오'이든, 남의 나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있었던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의 한 마디 때문에 이렇게 눈알 벌겋게 충혈될 만큼 신경써야 하는 것을 보면, 한국인으로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놀라운 곡예를 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약소국 국민의 비애가 진하게 베어져 나온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PeterGabriel™, Against All Odds..

진보는 좋은 것, 보수는 나쁜 것

[2004-08-16 이글루스에서 작성한 글]


열린우리당 신기남(辛基南) 의장은 "진보는 개방적이고 바꾸자는 것이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나, 보수는 폐쇄적이고 지키자는 것이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눈물겨운 한국 유력 정치인들의 정치 이념에 대한 이해의 바로미터가 아닐까 한다.. 신기남의 머릿 속에서 '개혁'과 '진보'는 국가 발전의 무조건적인 청사진이고, 정치적 승리의 '전가의 보도'인 것이었다..


그래.. 진보가 당신 말처럼 좋다고 치자..
오늘날 미국의 조지 W. 부시는 자신의 재임 기간동안 미국의 경제를 혁명적으로 일으켜 세워 놓았고, 작년에도 미국은 4%대의 기록적인 성장을 기록하였으며, 초고유가 시대인 요즘에도 미국은 여전히 성장세라고 자체 판단하며 금리를 인하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 反탈레반 전쟁하면서 국외적으로는 좀 욕을 많이 얻어 먹어도 내 나라 살림 일으키는데는 누구보다도 잘하고 있다.. 미국 경제 4% 성장은 전세계 경제가 2%가 성장한 것이나 진배 없는 엄청나게 기록적인 성장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빌 클린턴 시절 '지는 태양', '저무는 패권국' 이라 불리던 미국이 이렇게 막강한 지위를 다시 회복하는데 공헌한 조지 W. 부시의 정치적 이념과 노선을 굳이 분류를 하자면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 이라는 사실이다..

신기남 당신 말만 듣고 따져들자면 이 '보수 계열의 노선'은 폐쇄적이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을 내뱉은 당신이 정말 개방적이고 다름을 인정해 왔는지 강력히 반문하지 않을 수 없지만, 당신 머리 수준에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제대로 나올 리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말하기도 귀찮다..]


자아.. 신기남.. 당신은 이걸 어떻게 평가할텐가?
너무 폐쇄적이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서 나라가 저토록 탄탄대로에 올라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말한 '보수의 색깔'이 틀린 것은 아닌가?



되물어 본들 당신의 무지몽매함에서 당신 스스로 저지른 아이러니를 주워담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싸구려 인기 정당의 싸구려 의장이 내뱉은 실언 내지는 일본의 또라이 꼴통 수구들이 大東亞帝國에 대한 향수병이 도질 때마다 종종 내뱉는 망언과 같은 일종이라 생각하려는 나의 의견에 동의 하는가?

도대체 진보가 뭐라고 생각하나? 유신만 뒤지고 있으면 진보인가? 친일 청산하겠다던 양반이 잽 몇 대 맞으니까, 아프다고 책임자 경질하고 꽁무니 빼는 것도 진보인가? 오히려 지금와서 유신과 친일파를 내세우는 것이 더 보수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과연 그것이 스스로 보기에 나쁘다고 생각하는가? [나의 친일파 문제에 대한 견해는 일전에 언급된 적이 있어서 생략하고자 한다..] 자기들 대장인 대통령 닮아서 당의 중추적 책임자 세력의 일원(천정배 원내대표가 있으므로 단일한 명칭을 사용하지 않음)까지도 이렇게 입이 가볍고 생각이 얕은 것인가? 나는 종종 이런 무뇌아적 발언을 하는 녀석들을 볼 때마다 감당이 안된다..

뱀의 머리에서 용의 꼬리가 나올 수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딱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PeterGabriel™, Against All Odds..

Heritage Foundation, 부시2기 정책 제안

기사 보기 : 헤리티지 재단, 부시2기 정책 제안


미국의 전통적 보수주의 정치 이념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헤리티지 재단 [Heritage Foundation]에서 부시 2기 행정부에게 새로운 정책 제안서를 제출하였다.

'헤리티지 재단'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신문 기사 본문에도 게재되어 있듯이 미국의 전통적 보수주의의 씽크탱크(Think-Tank)로서 역대 미국 정부(특히 공화당 정권)에게 뼈대 있는 정책 조언을 많이 해왔고, 정계에 굉장한 정치적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신문 기사 본문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악의 제국(Evil Empire : 소비에트 연방을 지칭)과의 전쟁을 선언했던 레이건 행정부 시절, 헤리티지 재단은 800여개의 정책 제안을 담은 'Mandate for Leadership'보고서를 백악관에 제출하였고, 레이건 정부는 재임 기간동안 이 중 600여개 사항을 이행함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증명한 바 있다.
[이 때 담긴 사안에 대한 분량은 자료에 따라 이견이 있지만, 나는 'KBS 일요스페셜 : 네오콘 그들은 누구인가'에서 밝힌 자료에 근거하고자 한다.]

전통적 보수주의는 '新보수주의[Neo-Conservatism]'와는 구분되는 정치 이념으로 '먼로주의(제한된 고립주의)'에 기초한 초기 보수주의적인 성향을 띄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과 9.11테러 사태 이후, 그 정치적 성향이 다소 변질되어 지금은 新보수주의적 성향과 거의 구분이 힘들 정도로 정치적 성향이 유사성을 띄고 있다. 덕택에 지금은 신보수주의자들의 씽크 탱크라 할 수 있는 AEI(American Enterprise Institution 미국기업연구소 : 현재 소장이 내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Richard Perle 前국가안보정책자문위원이다. 사람들은 그를 '어둠의 왕자'라 부른다.)와 크게 정책적인 노선의 차이를 찾기가 힘들어졌으며 정치적으로 반대 성향의 씽크탱크인 브루킹스 사회과학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와의 노선의 차이도 점점 골이 깊어지고 있다. [언론에서 브루킹스 연구소 관련 학자/연구원들이 헤리티지와 네오콘에 대해서 비난하는 논평을 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헤리티지 재단의 주요 제안 사항]

◆ 북한과 양자합의는 안돼

헤리티지 재단은 존 캐리 민주당 대선 후보의 대북 정책의 기본 틀이었던 北美양자회담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있으며 북한 핵을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으며 검증가능한 방식으로의 핵폐기(Completely, Irreversible, Verifiable, Dismentling of Nuclear Programs)를 요구하고 있다. [Axis of Evil과 함께 조지 W. 부시의 최고 히트어 중 하나가 아닐까?] 헤리티지 재단은 이에 대한 근거로 1994년 제네바 핵협정 이후 북한의 신뢰할 수 없는 행동과 불안정한 정권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 헤리티지 재단의 지적은 미국의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북한에 대한 강경 정책은 미국의 이익에 지극히 부합되는 정책이라 판단된다. 양자 회담을 하든, 6자 회담을 하든 결국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회담의 주체는 미국이 주도하는 가운데, 북한이 수동적인 입장이 될 것이고, 나머지 국가들은 미미한 영향력을 미치거나 들러리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힘들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6자 회담을 통해서 1차적으로 중국과의 대외 관계에서 세계 패권 뿐만 아니라, 동북아 헤지머니에서도 중국, 일본에 절대우위임을 대외적으로 재확인하고 북한 핵이라고 하는 세계의 강대국들이 다수 관여된 초유의 관심사를 평화적으로 해결함으로서 유일패권국로서의 자국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재고하는 쪽으로 유도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현재 미국의 보수 정계의 최대 관심사는 중국에 대한 견제와 압박(GPR 추진과 미국의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WTO가입과 관련한 경제/외교 정책과 관련)이고, 6자 회담이 최초 3자(양자)회담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일본의 핵보유 용인 가능성을 흘리며 고의적으로 미국이 파이를 크게 만들었다는 점에 근거한다.


◆ 테러세력 지도자는 죽이거나 체포해야

헤리티지 재단은 테러리즘에 대하여 대단히 강경한 입장이다. 'Eye For An Eye('눈에는 눈' : 나는 이 속담이 한국의 속담인 줄 알았는데, 영어권 속담인 듯하다.)'이라는 말이 딱 맞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테러리즘에 대한 헤리티지의 제안이 결코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없으리라 확신한다.
헤리티지는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억누르려고 하는 듯하다. 기본적으로 정상적인 집단 간의 폭력이라면 그런 식(미국의 서부개척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폭력에 대한 더 큰 폭력의 응징)이 충분히 통할 수 있겠지만, 테러리스트들은 점조직이고 사실상 무한에 가깝게 보충 가능한 인적 자원을 지녔다. 기본적으로 이슬람 테러 집단의 종말을 보고 싶다면 이라크 국민 전체를 죽이거나 나아가서 이슬람 문명권에 속하는 일반 국민 모두를 죽인다면 '이슬람 교도 기반의 테러의 종말'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테러리스트는 한국의 '김구'가 했던 활동처럼 보는 관점에 따라 '무장독립투사'가 될 수도 있고, 무자비한 '대량 살인마'가 될 수도 있다. (일제 강점기간 동안 김구를 독립투사로 보았을 세계인은 과연 몇이나 있었겠는가? 똑같은 논리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라크인들은 심적으로 미국의 편이기보다 이슬람 무장세력의 편에 가깝다. 그렇다고 이분법적 피아 구분에 따라 이라크의 민중들을 '청소 작업'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좀 더 현명하고 이성적인 정책 제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성적인 행동 패턴을 가진 정상적인 집단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 이라크에 대한 연방제 제안은 처음 봤을 때는 상당히 일리가 있게 느껴졌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과연 실현 가능할까'라는 의문과 실현된다고 해도 얼마나 유지될 것인가하는 의문이 생겼다.

우선 정치인만큼 종교지도자의 영향력이 막강한 이슬람 지역의 특성상 정치/사회적 근거가 미역한 패권국의 세계전략의 편의를 위한 단순한 할거 형식의 연방 정부를 국민들과 과격 단체들이 얼마만큼 정당성을 인정할지 의문스럽고, 특유의 호전적인 성향을 가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잠자코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특히, 이슬람 분파들 간의 갈등이 엄청난 이라크 지역에서 어떻게 땅을 나눌 것인지도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새삼, 이라크의 내부적 갈등은 완전히 잠재운 사담 후세인의 '공포 정치'가 가진 힘의 카리스마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 영원한 동맹은 없어

이 요점정리를 보는 순간 Richard Perle, David Frum 공저(共著)의 'An End To Evil'이 생각이 났다.

이 부분은 해리티지 재단이 얼마나 신보수주의적인 이념에 전이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 생각한다. 물론, 헤리티지 재단 자체가 원래 국제관계나 국제 기구에 끌려 다니는 미국을 원치 않고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를 추구하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네오콘의 패권국 정책 특유의 독선적인 면은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제시한 헤리티지 재단의 제안서는, 신보수주의자들이 입버릇처럼 주장하는 '자발적 연합세력 형성'과 '독자 행동도 불사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아군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것을 이런 식으로 재차 강조하는 것은 '미국의 정책이 미국 내부적인 요인 이외의 요인에 의해 변경되거나 취소되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의지를 담은 강한 메시지'가 아닌가 판단된다.



어찌되었거나, 부시는 재임에 성공하였고 2기 행정부의 큰 구도는 점차 완성되어 가고 있다.
부시 2기 행정부는 강성(强盛)으로 알려진 '콘돌리자 라이스' 국방정책차관보를 전격적으로 국무장관으로 승진(그녀는 국방장관을 희망하였으나, 도널드 럼즈펠드는 국방장관직 포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럼즈펠드는 다른 루트를 통해서 사임 압력을 받고 있다.)시키며 네오콘 중에서도 급진적인 성향의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는 듯 했으나, 최근 승진을 누구도 의심치 않았던 존 볼튼 국무 군축담당 차관을 승진에서 누락시킨 채, 사임케 함으로서 쉽게 향후 정책 노선을 조금은 예측하기 힘들게 만들어 놓고 있다.


헤리티지 재단의 제안서는 일개 정책 연구원의 제안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헤리티지가 미행정부 내에서 가진 영향력과 미국 내에서도 최고 수재급 연구원들이 제출한 제안서가 가지는 신빙성은 분명 어떤 행정부 수반이라하더라도 무시하기 힘든 유혹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미국의 대통령에게 전달된 것이라면 그것은 바다 건너 우리 나라에서도 결코 무관할 수 없을 것이며 미국의 향후 행보를 예측하는데 반드시 참고해야 할 중요한 보고서가 될 것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비폭력 투쟁

2004년 12월 12일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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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책을 여러 권 구입하면서 마르꼬스와 관련된 책을 한 권 샀다.

하지만, 여지껏 읽지 못하고 있다. Model United Nations 때문에 너무 바빴고, 책을 한꺼번에 여러 권을 동시에 사는 나쁜 버릇(?) 때문에 다른 책을 먼저 읽게 되면 필연적으로 나중에 읽혀지는 책은 순번에서 밀리게 되고, 나의 도서 충동 구매에 의해서 새롭게 한 무리의 도서가 내 방에 진입하게 되면 그 전에 있던 책은 또 순번이 밀리게 된다. [실제로 사놓고 몇 페이지 못읽은 책도 몇 권 있다.]


하지만, 그와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전체적 조류로 등장하고 있는 좌익적/온건적 사회주의 성향의 정권의 출범 러시는 나의 관심을 유난히 끌고 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한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며 국민의 지지를 받은 사회주의 성향의 정권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미국 CIA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박정희를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라고 공공연히 말하며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죽은 날, 칠레 전역에 조기를 게양할 정도로 깊은 애도(?)를 표하기도 한 독재자이다.]의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극렬히 사회주의의 팽창을 진압했던 냉전 시기의 미국이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브라질의 룰라 정권 등에 대해서 잠자코 있는 모습이 약간은 나를 의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좌파적 성향이 미국이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국제 정세가 변화한 탓일까? [비단 칠레 뿐만 아니라,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군부 쿠데타 또는 독재 정권 지원, 미해군을 직접 작전에 투입시켜서 미국에 비협조적인 민주 정부조차도 전복시키는 등의 내정 간섭도 불사할 만큼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통제권을 강하게 주장해 왔다.(가장 최근에 아이티공화국이 미해병대의 침공(?)으로 정부가 전복되었고 대통령은 망명 상태다.]

단순히 공산/사회주의[두 정치 체제는 동일한 정치 체제가 아니지만, 편의상 함께 표기]는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통해서 대결 구도는 종식되었다고 판단한다면 쿠바는 왜 아직도 봉쇄 정책을 풀지 않는 것일까? 플로리다 반도와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아직은 자세히 모르겠다. 한국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국제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와 지식을 담은 도서를 확보한다는 것은 은근히 어렵다.


나는 그러한 '국가VS국가 차원'의 문제보다, 소수자의 투쟁의 방식에 새로운 '혁명적 비전'을 제시한 마르꼬스의 투쟁에 대해 더 관심이 많다. [말을 너무 많이 돌아서 와버렸다.] 사실 마르꼬스의 투쟁 방식은 이미 60여년 전에 마하트라 간디비폭력/비협조 투쟁과 그 큰 흐름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마르꼬스의 투쟁 방법은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간디 이후, 뚜렷하게 그러한 평화적 투쟁 노선을 추구한 소수 투쟁 집단이 없었고, 체 게바라/카스트로 등의 폭력적 투쟁이 영웅적인 행동으로 미화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과정에서 수없이 발생하는 폭력적 투쟁과 극명하게 비유가 되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마르꼬스는 '무장 게릴라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선언하며, '무장 투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주장한다. 나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일전에 밝혔듯이 약자가 강자에게 행하는 폭력은 강자의 더 큰 폭력을 부를 뿐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논리다. 유약한 민중들을 향할 수 밖에 없는 무장 게릴라의 테러 행위는 '테러의 공포로 인한 정책의 포기'를 의도하여 행해지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러한 국가는 존재치 않으며, 존재한다면 그 국가는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그러한 테러 행위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것이고, 유사한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테러 집단의 테러 위협에 시달릴 것이다. [스페인, 필리핀을 지칭/국가의 정책은 국외적 요인에 의해 쉽게 흔들려서는 아니되고, 국제 사회에서 개별 국가의 존엄성과 정책의 일관성을 과시하며 국가 정책에 대한 국제적인 신뢰 구축을 위해 그러한 국외적 위협에 대해 철저한 응징과 단호한 자세를 취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장 게릴라들은 (그들의 입장에서)핍박 받는 소수자들의 저항이고, 그러한 소수 세력의 지지자인 평화/반전 여론은 그러한 무장 게릴라의 폭력 행위에 대해서 반대한다. 소수자들의 저항은 언뜻 보기에 매우 정당성을 지닌 저항으로 보여질 수도 있으나, 그 저항의 화살이 누구를 향하는가, 어떠한 형식으로 향하는가에 따라 국제 여론과 정부 차원의 지지를 받을 수도, 그들의 지지자를 몰아낼 수도 있다. 국제 사회에서 강자가 아닌 자의 폭력은 폭력의 행위 주체보다 더 강한 폭력에 의해서 응징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여 왔고, 반복되는 폭력 속에서 소수자 정치 집단은 점점 고립되고, 소외되어 가는 것을 지켜봐 왔다.
[이-팔레스타인의 분쟁에서 과연 누가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는가? 정당한 폭력이란 존재하는가? 에 대한 물음에 '감정적인 적대감'을 배재하고 나면 가치 판단이 매우 모호해짐을 느낄 수 있다. 어떠한 가치관을 대비시키더라도, 결국 그러한 폭력으로 인해서 더 큰 고통을 받는 쪽은 상대적 약자인 팔레스타인 진영이다.]


그런 점에서 마르꼬스의 비폭력 투쟁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르꼬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매체는 멕시코 밖에서는 그다지 찾아 보기 힘들다. [정부는 멕시코와 수교국인 경우, 외교적 문제로 인해 공식적인 지지 표명은 할 수가 없는 입장이고, 회의식 외교를 하는 U.N.내에서 상호 협력을 희망하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공식적으로 정부가 수교국 정부의 적대 세력에게 지지를 표명하는 일은 없다.] 만약 마르꼬스가 처음처럼 계속적으로 무장투쟁 노선을 고수해 왔다면, 오늘날 이처럼 호의적인 국제 여론을 접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전쟁'은 가장 확실한 자국(또는 정치 집단)의 의지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정치 행위의 하나였고,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형태로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킨 경우는 많이 있어 왔다. 그러나, '국제 사회'가 등장하고, 국제 기구, 국제 여론이 등장하게 되면서 더 이상 폭력은 문제 해결의 수단이 되어 주지 못했고, 국제 사회는 폭력에 무조건적인 거부 반응을 보인다. 폭력은 문제 해결의 수단이 될 수 없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의 무장 게릴라들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투쟁의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폭탄 테러, 요인 암살, 민간인 납치 등은 아무런 문제 해결의 방법이 되어 주지 못한다. 매우 불행하게도(?) 그들(무장 게릴라)의 생각과 달리, 국가는 민간인 몇 명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고 해서 당장 국가의 정책을 변경하거나, 철회하지 않는다.
[필리핀, 스페인 같은 경우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다. 그러한 파퓰리즘적인 정치 행위로서 국내적 지지는 획득했을지 모르나, 국제적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통해서도 한국이 뼈저리게 느낀 바 있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약자의 폭력은 문제 해결의 선택 수단이 될 수 없다. 약자의 폭력은 강자의 더 거대하고 잔인하며 흉포한 폭력에 의해서 응징당하게 되어 있고, 인류 역사가 기록된 이래로 약자가 폭력적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폭력은 강자의 전유물이며 약자의 입장에 위치한 정치 세력은 그들의 위치에 상응하는 평화적이고도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해낼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야만 할 것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일요진단 '크리스토퍼 힐' 美대사

원래 오전에 썼어야 할 글인데 너무 피곤해서 자느라 못썼고, 1시쯤에 보일러 수리 때문에 일어났을 때는 특유의 새머리 근성 때문에 기억나지 않았고[....], 다시 자다가 일어나서 이제야 글을 써보게 되었는데 이미 상당수 기억은 망각의 강 저편에 두고 온 뒤라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 * * * * *


일요일 오전에 방송되는 '일요진단'이라는 프로그램에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대사가 출연했다. [꼽사리(?)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김기정 교수가 출연했는데, 너무 피상적인 말만 했고 또, 그럴 수 밖에 없는 시간 배분 때문에 출연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정치학을 전문으로 하는 이라면 누구나 할 만한 그 정도 수준의 얘기 밖에 할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시간을 많이 배분받은 '주인공' 힐 대사도 1시간 밖에 안되는 촉박한 시간과 다소 다듬어지지 않은 사회자의 질문에 충분히 자신이 전달하려던 의사를 전하지 못했던 듯 마지막에 끝인사에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일요진단'을 보며 한가지 느낀 것이 있다면, 역시 21C 탈냉전 완성 15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의 최우선 관심사는 여전히 '안보'이며 그 안보로 인해 한국 정치/외교는 여전히 족쇄를 차고 있고, 그 원인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북한 괴뢰군'에 있음을 재확인하게 하게 되었다.
사회자의 질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군사력(주한 미군 문제)과 안보와 관련된 내용의 질문에 집중되었고, 힐 대사 또한 그렇게 반복되어 제기되는 이슈에 따라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주한 미군에 대한 한국민의 이해와 감정적인 문제 또한 엄연히 군사적인 문제로 취급하고자 한다.]



가장 핵심되는 사안은 역시 한국민에게 널리 퍼져 있는 반미 감정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 : Global Defense Posture Review)에 따른 지역 주둔군 형식의 미군의 신속 기동군화에 대한 한반도 안보 공백 우려와 그에 따른 미국의 동북아 전략의 변화에 따른 것이 주요 화두였다.

힐 대사의 대답은 늘 우리가 들어왔던 보수계[세상 젊은이들 모두가 욕을 해도 나의 블로그에서 '보수주의(Conservatism)'은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나의 블로그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어줍잖은 진보'는 발붙이지 못한다.] 언론의 보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힐 대사는 GPR로 인한 해외주둔미군의 성격 변화가 동북아 지역의 안보 공백을 의미하지 않으며 군의 성격 변화에 따라 분쟁 지역에 예전보다 더 빠르게 관여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 한미 관계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문제 없음'을 강조하며 일요일 오전의 TV 시청자들로 하여금 현재 언론계에서 지속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한미 동맹(한-미상호방위조약은 자동개입 조항이 없는 '미국법에 준하는 적법한 절차를 거친 후에 발동되는 조건부 군사협력조약'이므로 정확히는 동맹이 아니나, 편의상 '동맹'이라 지칭한다.)균열설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애쓰는 부분이 역력히 노출되었다.


또 힐 대사는 '反美 감정', '反韓 감정'이라고 하는 표현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며(외교적 용어로서의 유감을 구사한 것은 아니다.) 표현에 신중을 기해야 함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한국 내 20대 대학생들에게 실시된 설문 조사를 근거로 상당히 설득력 있게 전개되었고(한국 안보를 위해 미군의 필요성에 대해 대학생 70%가 필요성을 인정하였으나, 미국에 대한 평가는 50%가 부정적이었다.) 한국 내 미군의 국내적인 문제를 지속적으로 사례를 확대 재생산함으로서 국민을 선동하려는 행위에 대해서 경계할 것을 지적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말하는 '反美감정'이란 것이 미국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것이라 표현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지적한다. 지난 11월 美대선에서 미국인의 48~49%가 미국의 현 정부의 행태에 대해서 반대표를 던졌다고 하여 그들이 反美세력이라 간주할 수 없듯이, 한국 내에서 미군의 특정한 사건/사고로 인해 촉발된 한국민의 감정적 대응에 대해서 그것을 '反美감정'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에 대해 대단히 우려를 표명하였다.
미국내의 反韓 감정에 대해서도 그는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미국 내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기대(?)와는 달리 주한 미군에게로 제한되어 있으며 '한국 내의 주한 미군의 입장과 한국 내의 국내적 입장과 정계의 입장을 미국 행정부에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는 다소 피상적이고 외교적인 발언으로 질문을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또 다른 사회자의 질문은 노무현 정부가 크나큰 착각 속에서 줄기차게 주장해 오는 '韓-美 양국의 대등한 입장에서의 대화'에 대해서 이제는 상호 존중 속에서 양국이 대화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힐 대사는 역시 매우 외교적인 발언[외교적인 발언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과 정치/외교적인 인식에는 다분히 그 거리가 존재한다.]의 연속이었다. 한국과 미국 양국은 항상 '상호 존중' 속에서 대화를 해왔고, 미국 정부 또한 그러한 정책 기조는 조금도 변화가 없음을 피력하였다. 그러면서도 힐 대사는 한국과 미국 관계를 '자신의 한국인 친구의 이야기'라고 발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가운데 피력한 주장에서 韓美관계를 '대기업과 그 대기업에 납품을 하는 중소 기업의 관계'로 비유하면서 두 기업은 납품과 대금 지불 등의 외견상으로는 대등한 관계이지만 실제적으로 그렇지 않듯이 한국민 내부적으로 현실적인 국력의 차이를 인정할 필요가 있음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하였다.
[이에 대한 힐 대사의 주장은 기존의 나 개인적인 입장과 완전히 일치한다.]


북핵 문제에 대해서는 조지 W. 부시의 기존 입장에 충실하면서 사회자가 질의 중에 내밀었던 존 캐리 후보 진영의 대북 정책관을 강하게 반박하였다.
외교적 발언으로 일관되게 주장된 대북 정책과 6자 회담에 대한 힐 대사의 입장은 한반도에서 한국민의 운명을 다루는 문제에 대해서 단순히 협상을 원할히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인해 양자 회담을 추진할 수 없으며, 한국민의 운명을 논의하는 자리에 한국민이 제외되어 미국이 한국민에게 결과를 통보하는 형식의 정책이 구사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말은 뻔지르르하지만, 실상으로는 6자 회담을 통해 동북아에서 중국과 일본, 러시아를 들러리로 세우며 사실상의 양자 회담을 추진하여 동북아의 정치적 헤지머니를 재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토론의 끝 인사에서 힐 대사는 韓-美간의 경제적인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세계 10위권의 산업국가인 한국과 미국이 양국 간의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가 맺어져야 함을 지적하며 자유무역협정은 韓-美 양국에게 호혜적인 Win-Win Trade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 부분은 내가 21세기에서도 변할 수 없는 한국의 숙명적 한계를 절감케 하는 대목이었다. 모두가 경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지금도 한국은 여전히 안보 문제에 발등에 불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안보적인 문제는 여러 차례 블로그에서 글로서 다뤄본 적이 있어서 특별히 추가적인 언급은 필요없을 듯하지만 힐 대사의 FTA 체결 희망 발언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당면 관심사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핵심적인 발언이었다.

특히, 힐 대사의 FTA 발언은 우회적으로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발생 가능성을 사실상 0%로 파악하고 있음을 이면적으로 시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쟁 위험이 높은 나라와 FTA를 체결해서 득될 것은 별로 없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한국과 FTA를 체결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단지 일개 외교관(토론 중에 힐 대사 자신도 특수한 정치 이론적인 문제는 평범한 외교관인 자신보다, 김 교수에게 문의하는게 좋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이 하는 말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대사'가 가지는 정치적 위상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해외 공관의 '대사'의 원래 직함은 '특명 전권 대사'로서 한국에 상주하는 조지 W. 부시 美대통령과 유사한 신분이다. (한국 국민들은 대사관 직원들을 너무 '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전체적으로 새해 벽두의 일요진단에서 힐 대사의 초청 대담은 한국에서 미국이 가지는 절대적인 위치를 재확인하는 자리였다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대단히 차갑지만, 미국은 오늘날 한국이 이 자리에 올라서는데 지속적인 지원(해방 이후 1960년대말까지 지속적인 억달러 단위의 무상원조, 1970년대 초반 주한미군 일부 철수의 댓가로 받은 15억 달러의 무상 군현대화 지원금은 분명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다.)과 결정적인 전기 마련(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전쟁특수는 한국의 재도약의 전기임에 틀림없다. 서툰 인본주의(Humanism)와 원론적 문제에 대한 갈등은 국제 사회에서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해준 것임에 틀림 없다. 또한 국제 관계에 있어서 한국의 발언권 강화에 있어서 미국은 충실한 한국의 배경 역할을 수행해 왔다.

지금와서 '보은(報恩)을 해야 한다'따위의 웃기는 소리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미국의 세계전략 안에서 행동할 때 미국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협력적 자주 국방이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재논의와 정치적 후진국 국민 특유의 냄비 근성(냄비 근성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정치 후진국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문제다.)이 가져 오는 정치 혼란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작금의 이 혼란은 정치인들이 쓰레기여서가 아니다. 그 정치인들을 뽑은 사람들은 국민 개개인이다. '정치가 썩었다'는 말은 곧 '그 나라 국민이 썩었다'는 말과 동일시 된다. 학연/지연따위가 정치를 병들게 한다는 말은 한마디로 국민들 내부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피해망상'에서 비롯된다. 미국 하원 의원 중에서 10선 의원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역 의원에 대한 특혜와 미국민 특유의 보수적 성향, 학연/지연에 대한 호소, 정치자금 모금행사 등에서 생기는 현역 의원들의 프리미엄 등에 대해서 미국민 모두가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고, 국민과 정치의 괴리를 우려한다. 하지만, 그들의 정치는 적어도 우리보다 깨끗하고 의원 개개인은 다분히 능동적이며 의회는 투명하다.


현재의 우리 정치권은 각성을 할 필요가 있다.
이상적인 선동성 구호을 외치며 국민을 꿈꾸게 하고, 현실 감각없는 정책으로 국부의 낭비와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행위가 과연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를 좀 더 넓은 안목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에게 미국을 부가적인 의미로 두고 우리가 동북아와 같은 구도 속에서의 한반도 안보를 수호하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협력적 자주 국방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실제적으로 우리가 중/일 등의 군사적 위협에 자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국력이 되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논의, 지금보다 전쟁 위협이 더 절실했던 냉전기에 우리의 군사 정권들은 어떻게 당면 과제를 '지혜롭게' 극복해 나갔는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적어도 한반도 안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군사 정권 시절의 정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좌파적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민족 자주성을 침해하고, 배알 없는 외교일지 모르나, 적어도 그들이 주장하는 자주 국방보다는 훨씬 현실적이고, 국민의 고통을 덜어 왔으며 또 지난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왔다. 아직도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고, 강감찬의 귀주 대첩 같은 전설적인 역사에 젖어 '외세의 침략을 우리 힘으로 막아 내자'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 젖어 있다면 시대를 잘못 태어난 스스로를 먼저 탓해야 할 것이다.

이제 지구상에서 '자주 국방'을 외치는 국가는 현실적으로 북한과 한국 밖에 없다. 그나마 한국도 2004년 도널드 럼즈펠드 美국방장관의 연례국방장관안보회의 협의차 방한한 이후 '협력적' 자주 국방으로 그 수위를 한 단계 낮추었다. 왜 이렇게 국제 사회가 안보 문제에 대해서 관점이 변화해 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