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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이익

꽤나 오래 전에 쓰다가 내버려둔 글인데, 며칠 전에 글을 완성했다. 쓰다가 잊어버린 상태로 상당한 시간이 지나 버리니, 나 자신조차도 이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듯 하다.

---절취선---

오늘 [2005년 9월 12일]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갑자기 국가이익에 대한 논쟁이 떠올랐다.
스스로 밝히듯이 나 자신은 新현실주의/新보수주의적 입장의 국제 사회와 국가관을 가졌다. '보수주의의 무덤'이라는 10~20대의 아쉬움 모르고 세상 모르는 우리 젊은이들이 지배하는 인터넷의 세상에서 보수주의란 그저 낡고, 권위적이며 이기적인 논리일 뿐이다.
하지만, 보수주의/현실주의는 국가 레벨, 세계체제 레벨에서 일어나는 많은 현상들을 가장 효율적이며 적실성 있게 설명할 수 있으며 개인의 레벨에서도 상당히 현실적이면서도 높은 적실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내가 보수주의로 입장을 조금씩 선회하게된 까닭이다. 난 적실성 있으며 설명 가능한 부분이 더 많은 이론을 원한다. [그런 면에서 구성주의적 시각도 좋은 선택이겠지만..]

---절취선---

현실주의/보수주의에서 논하는 '국가 이익'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국익'이라고 줄여 부르는 이 '국가이익'이라는 개념은 개개인이 가진 정치적 이념의 스펙트럼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하지만, 그러한 이념의 스펙트럼 속에서도 전체적으로 성향에 따른 비슷한 공통점이 나타나고, 내가 현실주의적 입장을 대변하는 여러 정치학 서적을 통해서 얻은 지식과 생활 속에서/다른 사람들과의 논의 속에서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약간의 글을 끄적여 볼까 한다.


우선 '국가 이익'이란 것은 매우 단순하다. '해당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것'이 바로 국가 이익이다. 이 단순한 해석은 누군가가 당신을 찢어 죽이겠다고 해도 바뀌지 않는 절대적이면서도 단순명료한 해석이다.
하지만, 이 단순 명료한 개념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며 또 실제로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대체적으로 자유주의/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과 지지자들에게서 '국가 이익'은 매우 원초적이며 '국가 이익'이라는 해당 문자 자체의 의미에 충실하다. 자유주의/진보적 성향을 가진 세력들에게 국가 이익은 절대적으로 '해당 국가에 긍정적인 요소'를 의미하며 모든 협상과 논의의 결과에서 소위 'Win-Win전략'내지는 '제로섬적인 의미에서 어느 한 쪽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 이익은 문자 그대로 이익이 되어야 하며 이익이 추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유주의/진보적 성향의 세력들은 대체적으로 '국가이익'에 손상을 입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펼치게 되는 이론적 근거에는 '국가對국가의 개념' 즉, 너와 내가 동등한 하나의 국가(또는 국제 사회/국제기구)라는 의미를 내재하고서 어느 한 쪽이 우월하거나 열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UN총회에서 상임이사국이나 비상임이사국이나 똑같이 1표씩을 행사한다는 식의 측면이 강조된 것이다. 따라서 이론상으로 어느 일국은 타국에 대외적으로 어떠한 차등한 대우도 받을 이유가 없으며 동등한 지위에서 대등한 논의를 통해서 상호간의 국가이익이 추구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신을 무정부주의자라고 주장하는 Noam Chomsky.(일부에서는 그의 무정부주의 자처는 '위선'이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지난 30년 세월동안 변치 않았던 그의 논지와 비판은 9.11테러 이후 변화하는 국제 사회 속에서 다양한 방향에서 그의 '현실성이 결여된 비판'과 '모두가 공감하는 사실에 대한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비판'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세력들로부터 다각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 이제 만년에 접어든 그의 선택은 무엇인가?]

그러나, 현실주의에서의 국가이익은 상당히 모호하며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을 많이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현실주의의 국가이익은 자유주의/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에게 그 의미의 모호성을 비판 받으며 명쾌한 이론적 성격을 지니지 못함을 멸시 받는다. 그렇다면 현실주의의 국가이익은 도대체 어떻게 다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추구되어지는 것인가?

현실주의에서의 국가이익도 개념상으로는 자유주의/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국가이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주의적 입장에서의 국가이익도 해당 국가의 긍정적 요소를 중시하며 절대적 가치가 증진되는 상황을 선호한다.
하지만,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힘(Power)라는 개념은 이러한 단순명료함에 큰 장애물이 된다. 세상의 논리는 강한 자의 목소리가 약한 자의 목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지는 법이다. 국제사회는 사실상 무정부상태(Anarchic Framework)이며 현실주의는 이 점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현실주의의 또다른 면은 '약육강식에 대한 동의'다. 이것은 현실주의가 지극히 근대적 인간관 속에서 파생된 힘의 논리를 강조하며 수용하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일반 대중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부감과 적대심리를 조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들 자신은 이미 평생을 이 논리 속에서 살아 왔으며 가족이라는 테두리 밖에서는(심지어 가족 안에서조차도) 언제나 이 힘의 논리 속에서 살아 왔다는 것을 간과/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현실주의의 국가이익은 반드시 플러스 요인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절대적 가치에서 마이너스적인 요인을 가지고 현실주의에서는 플러스적인 결과로 해석하기도 하며 이러한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가치 판단으로 인해서 현실주의적 가치 판단에서의 국가이익에 대한 논의는 자유주의/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에게 비난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틀린 설명이라 할 수는 없다.

마이너스적 결과에 대한 국익에 대한 예로서 한국의 이라크 파병과도 같은 사건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라크 파병은 베트남 파병과 달리, 물질적/정책적으로 특별히 한국의 절대적 개념의 이익에 대해 보장을 받은 것이 사실상 거의 없다. 이런 점에서 많은 (한국의) 진보진영에서는 대표적인 노무현 정권의 실책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실제로 노무현의 무신경한 對美외교 정책과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오랜 시간동안 구축되었던 對美외교라인의 단절한 것 등은 분명 노무현의 외교정책의 실책이고, 그 실책의 후폭풍(이라크 파병과정에서 손실 분담 실패 등)은 온전히 우리 국민들이 떠안았다.
하지만, 현실주의적인 면으로서 약간 다르게 보자면 부시가 한반도 주둔군을 GDPR(Global Defense Posture Review)을 통해 신속기동군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한국의 국방력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주한미군이 해외로 빠져나가거나, 이라크로 파견할 것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전쟁억지력이 많이 낮은 한국군의 극히 일부를 파병함으로서 주한미군의 이탈을 최소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불어 노정권이 국내적 상황을 적절히 어필한 결과,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역에 우리 군을 파견할 수 있었다. 이 점을 현실주의적 시각으로 따지면 '비용의 최소화'가 된다. 100을 잃어야 하는 상황에서 50을 잃는 결과를 만들었다면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이러한 마이너스적인 결과 또한 '국가이익'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매우 단순하고 쉬우면서 동시에 우리 삶 속에서 매우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단지 그 단위가 국가/국제사회의 레벨로 확장되어 있을 뿐이다.

[아르빌에 주둔한 한국군. 북한 김정일 왕조의 계속되는 평화 공세 속에서도 장사정포 후방 배치, 핵개발 포기와 제네바 협약 준수, NPT재가입과 CTBT재비준, CVID 등의 참되고 검증가능한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행보를 거부하는 현재의 북한의 무모하고 비평화적인 입장이 고수되는 한, 한반도에서 한국군의 주요 전력 대부분과 한국군 정보력의 99%를 전담하는 주한미군의 현상 유지는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사안이 될 수 밖에 없다.(꼭 그런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미군의 역할은 동북아 군비경쟁 속에서 세력균형의 조정자이자 견제 세력으로서 그 기능을 할 것이다.) 과연 김정일은 동북아 평화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염두해 두고 있는 것 인가?]

이런 현실주의적 시각에는 인권, 환경 등과 같은 '제3의 길'이 반드시 거론된다. 현실주의적 시각에는 인권이나 환경은 분명 우선순위에서 상대적으로 뒤쳐지기 마련이다. 이에 대한 현실주의의 명쾌한 대답은 없다. 현실주의 또한 인권과 환경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더욱 큰 목표인 '생존'을 위한 행보 아래에 때로는 불가피하게 그러한 요인들이 제2열로 밀리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현실주의의 그것이 일반적인 입장에서 수용하기 힘든 수준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전시 상황에서 강제 징병과 강제징집이 은연중에 묵인되는 것과 큰 맥락을 함께 한다. 환경과 인권과 같은 제3의 길은 일반 대중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진다. 그것은 일반적인 평시에 기존 질서에 대한 엄청난 파괴력과 풍요로움 속에서 또다른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경제적 부국들의 국민들에게 새로운 추구해야 할 가치와 달성해야 할 목표로서 인식된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는 적어도 인지적으로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때로는 인권과 환경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현실주의는 바로 그것의 확보를 최우선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국가이익'이며 그 국가이익은 '원초적 생존'을 최종적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