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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 : 아쉬움을 뒤로하고.. 겉과 속이 다른 모습

[오 사다하루 감독과 우에하라의 하이파이브 장면. 오늘 일본의 승리의 8할은 우에하라가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언론이 온통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수퍼스타 이치로에게 집중되어 있는 동안 알토란 같은 선수들이 묻힌다.]

지난 주 금요일에 미국이 멕시코에게 박살하는 모습은 구경하고 학교에 가서 후배들과 이야기하면서 했던 말이 있다. '나는 한국이 4강에서 져도 상관없다. 미국을 꺾고 전승으로 4강에 오른 것으로 만족한다.'라는 말과 함께 '한국의 타선이 우려된다. 상대에게 연구되고 있고 안타가 점점 줄고 있다'라는 말이었다.

결과론적으로 한국은 4강에서 정말 떨어져 버렸고, 한국의 타선은 박찬호의 소속팀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홈구장 Petco Park에 내리는 비처럼 물먹은 솜방망이가 되어 버린 채 완봉패 당하고 말았다. 금요일에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나의 실망감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으며 또한 번 거지 같은 조편성과 더 거지 같은 토너먼트 구성에 자지러졌다.

하지만 어찌하리오. 어차피 상대도 우리와 똑같은 조건이었다. 같은 조건에서 졌을 뿐이다. 그리고 원래 우리가 이기기 힘든 상대였으며 야구계의 대선배인 일본야구에 졌을 뿐이다. 우리가 진작에 졌어야 할 팀에게 2번이나 승리한 이후에 진 것일 뿐이다. 야구를 모르는 다수 국민들은 7회 급작스럽게 무너진 한국 야구에 대실망을 했을 테지만, 그것이 현 수준에서 어쩔 수 없는 한국과 일본의 야구 수준의 차이였다. 그 동안 이렇게 우수한 성적으로 싸워온 것이 기적적이다. 나조차도 심지어 멕시코에게 한국이 승리했을 때 '기적'이라고 표현했었다. 그게 한국 야구의 명백한 수준이었다. 너무 기분 좌절할 것이 없다. 애초에 대만을 잡자고 '대만전 올인'을 외치던 한국이 미국/멕시코에 이어 일본을 2차례나 격파한 것으로 이 대회 참가의 의의는 충분하다.


평범한 10년지기 동네 야구꾼인 내 눈에 비친 한국 야구의 패인(敗因)에 대해서 몇 가지 언급하고 싶다.

1. 완전하지 못했던 투수진
명백히 말해서 한국이 이 자리까지 오른 것은 투수진의 힘이었다. 흐름을 타야 하는 타선에 비해서 투수진은 꾸준하고 지속적으로 평균적인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한국 투수진은 박명환이 도핑테스트에 적발되어 전력에서 이탈하였고 좌완 불펜의 핵심요원 구대성이 몸상태가 좋지 않아 전력에서 이탈했다. 구대성이 빠지면서 불펜진의 좌우 비율의 핀이 어긋났다고 본다.
더불어 김병현이 좋은 구위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홈런 한 방에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무너졌다. 특히 홈런 직후의 노골적인 HBP(속칭 '데드볼')는 심판의 즉각적인 경고를 초래했고, 이는 한국의 볼판정에도 미묘하게 불리한 판정을 야기했을 것이다.
김병현의 조기 붕괴로 봉중근/배영수/손민한 등이 몸이 충분히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조기 등판하게 되었고 특히 배영수 같이 WBC에서 부진했던 선수들을 기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야기했다. [이 부분은 원래 구대성의 몫이어야 했고, 메이저리거 김병현이 좀 더 안정감을 주었어야 했다.]


2. 결과론적인 감독의 용병술 실패
경기에서 패배하면 1차적 책임은 역시 감독에게 쏟아지게 마련이다. 김인식 감독과 코치진은 선발 투수를 짧게 가져가고 불펜진을 풀가동하면서 이번 WBC에서 상당히 쏠쏠한 재미를 봤다. 4강 진출의 원동력은 명백히 투수진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덕분이며 여기까지 온 것은 그들의 용병술의 승리였다. 하지만 4강전에서는 그들의 그런 용병술이 독(毒)이 되었다고 본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1차적인 문제점은 서재응의 조기강판이다. 한국의 투수진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서재응의 5이닝 강판은 적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팀의 핵심 전력인 박찬호, 구대성이 가동불능인 상황에서 팀내 가장 안정적인 서재응이 최소한 6~7이닝은 맡아줄 필요가 있었고 그는 충분히 그것이 가능한 투수다. 아마도 김 감독은 4-5회 서재응의 공이 이마에/오가사와라/사토자키 등에게 정타를 맞은 외야 플라이를 허용하는 것에 '서재응의 공이 맞아나가기 시작했다'라고 판단하여 내린 듯 하다.
문제는 같은 이닝에서 일본 선발 우에하라 또한 4회말 이종범/이승엽/최희섭에게 2루타/홈런성 플라이를 연달아 허용했고, 5회에도 이진영이 중견수 플라이, 박진만의 투수 앞 안타, 조인성의 외야플라이를 허용하며 투구수가 70개에 육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서재응은 강판 때 투구수가 불과 58개였다.]

여기서 오 사다하루와 김인식의 판단은 엇갈렸고 우에하라는 7이닝간 한국타선을 셧아웃시켰고, 불펜진이 얇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선발투수를 조기강판시킨 한국팀은 전병두-김병현-봉중근-손민한 등이 연타를 허용하여 타자일순을 시키고 말았다. [특히, 김병현의 어처구니 없는 붕괴는 다시 한 번 그의 과거 인격적인 트러블을 의심케 했다.] 서재응의 조기강판이 너무 아쉽다.

3. 정규 리그전 스타일이 되어 버린 단기전
토너먼트전을 하면서 같은 팀과 3번이나 붙는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토너먼트의 의외성을 희석시키는 이와 같은 대진표가 韓日 양팀의 전력누수를 불러왔고 상대적으로 전력상의 우위가 명백한 일본팀이 특유의 분석야구를 펼칠 시간적 여유를 제공했다고 본다.
일본 분석야구의 힘은 이승엽이 유독 일본전에서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재팬리그에서 현역으로 뛰는 이승엽인지라 재팬리그 선수들이 주축이 된 일본팀에게 불행히도 이승엽은 상대적으로 완전히 까발려진 선수였다. 유독 일본전에서 피삼진이 많은 이승엽은 그 때문이다. 팀의 쌍포였던 김동주/이승엽이 부상으로 나가 떨어지고, 분석된 상황에서 일본전 타선의 화력은 안그래도 약한 타선에서 더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극도의 부진에 빠져 있는 한국타선에게 분석당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무언가 새로운 활로를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韓日이 함께 분석하더라도 데이터에 걸맞게 역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분석의 의미가 있지만,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한국 타선은 그 데이터를 활용할 정도의 컨디션이 되지 못했고 그것이 결정적인 패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본다.


4. 많은 선수들의 부상 이탈
이 또한 선수들의 부상과 관련된 것이다. 선수층이 얇은 한국팀에게는 A급 선수 한 명 한 명이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WBC에는 많은 전력누수가 있었다.
내 블로그의 WBC글은 대부분 상대팀의 관점에 집중한 터라 새삼스레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한국팀의 전력/특히 타선은 절름발이나 다름 없었다. 부상으로 인해서 국제대회에서 유난히 클러치 능력이 막강했던 박재홍이 전력에서 이탈했고, 국내최고의 3루수 김한수도 전력에서 이탈했다. LG에서 중심타선 밖에 치지 않는 이병규가 리드오프를 보는 오늘의 한국 타선은 마치 韓美전에서의 미국 타선처럼 짜임새 있는 공격력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른 경기에서는 그리 많이 노출되지 않았던 것은 단판승부의 특징 탓이었지, 2주일 사이에 3번이나 붙게 된 일본전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점이 적극적으로 노출되었다고 판단된다. 박한이/정수근/강동우 등의 리드오프로 많이 출전한 선수들이 무척 아쉬웠다.
배영수/박명환/송지만/김태균 등의 선수들이 정상 컨디션을 찾지 못해 최악의 성적을 올린 것도 한국팀의 큰 아픔이었다. 특히 김병현의 붕괴와 함께 한국팀의 추격 의지에 완전히 찬물을 쏟아 버린 배영수의 피홈런은 정말 뼈아픈 일격이었다.


[아쉽게 되었지만, WBC는 한국야구의 위상을 격상시키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대회로 기억될 것이다. 야구 변방 한국에 대한 야구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의 시각은 이번 대회를 계기로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특히 전 경기 無실책 기록과 첫 60이닝 최소실점 기록 등은 한국 야구의 탄탄한 기본기를 검증 받기에 충분했다.]

이 대회를 통해서 확인한 것도 많다.
가장 큰 것은 역시 2005년 루키 '오승환'이다. 2005년 시즌 초반 오승환의 투구를 처음 봤을 때 야구를 같이 보던 친구에게 내가 '구위가 좋다. 두고봐라. 크게 될 재목이다.'라고 꽤나 진지하게 말했던게 기억난다. 사실 초반에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선수가 워낙 많아서 내가 말하고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오승환의 구위가 국제적으로 검증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자신감의 회복도 무척 큰 소득이다. 대만야구를 꺾는 것에 총력전을 펼치겠다던 팀이 미 본토의 야구지존 쌀나라 올스타즈를 격파하는 역사를 이룩하며 국내야구에 대한 자긍심 고취와 한국프로야구에 대한 대내적 관심 회복이 가장 큰 소득이다. 삼성그룹의 대구 돔구장 건설이 대구광역시의 어처구니 없는 요구(삼성에게 돔구장을 지어 대구시에 희사할 것을 요구하여 돔구장 건설이 백지화됨.) 등으로 유야무야된 신축 야구장 건설 등 경기장 안팎의 지원이 다시 기지개를 펼 것으로 무척 기대된다. 질 낮은 구장에서는 질 낮은 경기력 밖에 나올 수 없다.
혹시 美메이저리그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이번에 미국의 야구장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4만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 크기와 그 구장을 가득 채우는 관중들, 초호화 구장 설비(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홈구장에는 120달러 이상의 좌석도 있다.)와 선수들의 안전에 최적화된 완벽한 완충장비의 외야펜스와 관중과 선수가 함께 숨쉬는 공간(특히, 2차 韓日전 이치로의 8회 파울볼 처리 과정은 그 백미다.)이라는 점은 한국야구에서는 꿈도 못꾸던 그 장면들이 아닌가? 이번 역사를 계기로 한국야구계에도 거대한 판도 변화가 불어오길 기대한다.

이번 WBC는 내게 큰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왜냐구?
내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지상파 3사에서 "정규방송관계로 중계방송을 마칩니다." 라는 개소리(!!)를 듣지 않고 편안하게 야구 경기를 관전해 봤거든.

Hedge™, Against All Od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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