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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서서 (서원직)

뜬금없이 삼국지의 서서(서원직)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다. 조조에게 떠나고 나서부터는 어지간한 삼국지 관련 도서에서는 서서의 이야기를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적벽戰이 있을 때쯤에 방통과 함께 슬쩍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생각이 난 김에 좀 찾아 봤다.

네이버에서 manbong1717 이란 아이디를 쓰는 사람이 쓴 글인데, 삼국지 정사의 번역판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의 글 중에서 또 일부를 발췌한 것을 스크랩하였다.


'위략'에 이르기를, 서서의 원래 이름은 서복(庶福)이었는데, 근본이 명가 출신은 아니었다. 젊을 때는 임협(강호의 활동)을 좋아했고, 격검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옛날 중평(후한 영제 치세, 서기 184~189년) 말년,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원수를 갚아준 다음, 흰 흙을 얼굴에 바르고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채 도주했었지만, 관원에게 체포되었다. (조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묻자 입을 다문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원은 수레 위에 기둥을 세워 그를 묶고 큰 북을 울리며 온 시장을 돌아다녔는데, 그와 면식이 있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동료가 그를 훔쳐, 포박을 풀어주었기 때문에 간신히 달아날 수가 있었다.

그 결과 마음에 크게 느낀 바가 있어 칼과 극을 버리고, 소박한 두건과 한곁 의복의 가난한 몸차림으로 바꾸고 마음을 고쳐 공부에 전념했다. 처음 서당에 다닐 때는, 학생들이 그가 이전에 무법자였다는 것을 알고 감히 사귀려고 하지 않았었다. 서서는 그곳에서 겸허한 태도를 취했고,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혼자서 청소를 하고 남의 기분을 잘 읽고 행동했으며, 경학을 배우고 공부하여 경서의 내용에 정통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같은 군(예주 영천군)의 석도와 사이좋게 교제하게 되었다.

초평(후한 헌제 치세 초기, 서기 190~193년) 연간, 중원에서 전쟁(아마도 동탁-반동탁연합간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석도와 함께 남쪽 형주로 여행을 떠났고(도피했고), 도착한 다음에는 제갈량과 특별히 친하게 되었다.

형주가 조조에게 함락되자(208년 9월) 제갈량은 유비와 함께 떠났지만, 서서는 석도와 함께 북으로 갔다.

황초(위 문제 치세, 서기 220~226년) 연간에 이르르자 석도는 관직에 나가 군수와 전농교위를 역임했고, 서서는 우중랑장과 어사중승에까지 이르렀다.

태화(위 명제 치세, 227년~) 연간에 이르러, 제갈량이 농우(옹주 서부)로 출병했을 때(227년 겨울), '원직(서서)과 광원(석도)이 그 정도 관직 정도밖에 이르러있지 않다'고 듣자, 개탄하며 말했다. "위에는 어쨌거나 인물이 많구나. 어째서 그 두사람이 중용되지 못하고 있는가!"

서서는 그 몇년 뒤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묘지는 팽성(서주의 패국과 하비 사이에 위치)에 있는데 아직도(위략이 편찬되었을 당시, 3세기 말) 남아있다.


마지막 부분의 말은 3C말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건지, 지금도 있다는 건지 약간 모호하네. 서서(서원직)의 삶은 조조에게 떠나고 나서부터는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소리소문없이 갔다(?)는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많은 소설 속에서 서서의 이야기가 조조에게 떠난 이후에 나오지 않을 만 하다.

Hedge™, Against All Odds..

삼국지 : 서서 (서원직)

뜬금없이 삼국지의 서서(서원직)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다. 조조에게 떠나고 나서부터는 어지간한 삼국지 관련 도서에서는 서서의 이야기를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적벽戰이 있을 때쯤에 방통과 함께 슬쩍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생각이 난 김에 좀 찾아 봤다.

네이버에서 manbong1717 이란 아이디를 쓰는 사람이 쓴 글인데, 삼국지 정사의 번역판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의 글 중에서 또 일부를 발췌한 것을 스크랩하였다.


'위략'에 이르기를, 서서의 원래 이름은 서복(庶福)이었는데, 근본이 명가 출신은 아니었다. 젊을 때는 임협(강호의 활동)을 좋아했고, 격검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옛날 중평(후한 영제 치세, 서기 184~189년) 말년,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원수를 갚아준 다음, 흰 흙을 얼굴에 바르고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채 도주했었지만, 관원에게 체포되었다. (조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묻자 입을 다문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원은 수레 위에 기둥을 세워 그를 묶고 큰 북을 울리며 온 시장을 돌아다녔는데, 그와 면식이 있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동료가 그를 훔쳐, 포박을 풀어주었기 때문에 간신히 달아날 수가 있었다.

그 결과 마음에 크게 느낀 바가 있어 칼과 극을 버리고, 소박한 두건과 한곁 의복의 가난한 몸차림으로 바꾸고 마음을 고쳐 공부에 전념했다. 처음 서당에 다닐 때는, 학생들이 그가 이전에 무법자였다는 것을 알고 감히 사귀려고 하지 않았었다. 서서는 그곳에서 겸허한 태도를 취했고,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혼자서 청소를 하고 남의 기분을 잘 읽고 행동했으며, 경학을 배우고 공부하여 경서의 내용에 정통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같은 군(예주 영천군)의 석도와 사이좋게 교제하게 되었다.

초평(후한 헌제 치세 초기, 서기 190~193년) 연간, 중원에서 전쟁(아마도 동탁-반동탁연합간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석도와 함께 남쪽 형주로 여행을 떠났고(도피했고), 도착한 다음에는 제갈량과 특별히 친하게 되었다.

형주가 조조에게 함락되자(208년 9월) 제갈량은 유비와 함께 떠났지만, 서서는 석도와 함께 북으로 갔다.

황초(위 문제 치세, 서기 220~226년) 연간에 이르르자 석도는 관직에 나가 군수와 전농교위를 역임했고, 서서는 우중랑장과 어사중승에까지 이르렀다.

태화(위 명제 치세, 227년~) 연간에 이르러, 제갈량이 농우(옹주 서부)로 출병했을 때(227년 겨울), '원직(서서)과 광원(석도)이 그 정도 관직 정도밖에 이르러있지 않다'고 듣자, 개탄하며 말했다. "위에는 어쨌거나 인물이 많구나. 어째서 그 두사람이 중용되지 못하고 있는가!"

서서는 그 몇년 뒤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묘지는 팽성(서주의 패국과 하비 사이에 위치)에 있는데 아직도(위략이 편찬되었을 당시, 3세기 말) 남아있다.


마지막 부분의 말은 3C말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건지, 지금도 있다는 건지 약간 모호하네. 서서(서원직)의 삶은 조조에게 떠나고 나서부터는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소리소문없이 갔다(?)는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많은 소설 속에서 서서의 이야기가 조조에게 떠난 이후에 나오지 않을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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