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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무가치한 사회인의 인간관계.

일종의 개인사업자로서 자영업종으로서 사회생활을 영위하다 보니 요즘에 와서 부쩍 많이 드는 생각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무가치한 인간 관계 중에 하나가 직장을 다니면서 일 때문에 알게 된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일 때문에 만나면서 호형호제나 친구라고 부르는 사이는 옛날 어른들의 말을 빌리면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서 하는 거짓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으례히 붙이는 말을 덧붙여서 '모든 직장이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적잖은 사람들'이 그러한 가식적이고 피상적인 인간관계로서 서로에게서 '재화/돈'이라는 이름의 피를 빨아먹기 위해 자신이 꾸밀 수 있는 가장 예쁜 가명을 뒤집어 쓰고서 상대방의 가장 여리고 인간적인 감성의 한귀퉁이를 좀먹으며 기생하려 한다. 한 마디로 상대방이 내게 돈줄이 되거나, 금전적으로 이익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파생시킬 수 있는 '유용한 개체'가 아니라고 판단되는 순간, 그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는 놀랍도록 신속하고 정확하게 정리됨을 당하는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우호적 표현이나 인간적 예절을 담은 표현도 필요치 않은 듯 하다. 민감성을 지닌 표현으로 직장에서 존재하는 인간관계는 '돈되는 인간과 돈 안되는 인간', '나의 신분상승에 도움이 되는 호구과 장애가 되는 걸림돌'로만 존재한다. 情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놀랍도록 타산적이고 냉혈적이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의 신분적 불안정이나 자신이 소속된 불특정 다수의 집단(그 범주의 경계는 놀라도록 유연성을 지닌다.)을 상대로 하는 감성적 호소에 대해서는 신속하면서도 기하급수적으로 감성적 어프로치를 폭발시킨다. 한마디로 자기 마음이 내키는 만큼이다. 부인해도 부인될 수 없는 현실이고 진실이다.

사람을 만나고 새로 사귀기가 점점 더 까칠해져만 가는 세상이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라도 지키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일로서 만나고 알게 된 사람들은 딱 그들이 가진 수준만큼만 관계하고자 한다. 원래 그것이 내 실제 모습인지도 모르겠지만, 사회인으로서의 첫 1년은 다소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 따라서 평소의 나로서는 다소 과도한 붙임성을 보이고자 노출시켰지만, 결국 사사로운 몇 번의 사회생활 내의 인간관계의 허무함과 배신을 지나 오늘 또다시 대금결재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그 '하찮은 친분'을 무기로 나와 우리에게 기생하려다가 거부당하자,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새로운 하찮은 친분'을 찾아 떠난 거래업체를 보며 새삼 되뇌이게 된다. 놀랍게도 그 거래처가 떠났는데도 나와 우리는 조금도 아쉽지 않아 하고 있다. 그 업체는 어딜가도 그렇게 또다시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버림 받을 것이다. (이미 부채가 자기자본을 넘어서기 시작했거든. 남은 어음도 얼마 안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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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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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교수의 저서 '국가의 역할' 中. 책이 사실상 새 책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깔끔하다. 내가 가진 책들의 절반 가량은 이렇게 새삥한 채로 보관되고 있다. 장하준 교수의 경제관은 내가 바라보는 관점과 상당히 일치하는 면이 많아서 책을 보기가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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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의 저서인 '기로에 선 미국' 中. 내가 가진 나머지 절반 가량의 책들은 이렇게 교과서를 공부하듯이 펜자국이 여기저기 남겨져 있다. 후쿠야마의 비교적 최근 저서인 이 책은 신보수주의에 대한 대중의 오해를 해명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난 나 스스로를 '한국적 신보수주의자'라고 칭한 적이 있다. -같은 인식틀 안에서도 강대국과 약소국은 그 국가와 국민이 가진 역량에 따라 대내/대외정책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며 이상론을 배척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 점은 크게 다르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쿠야마의 저서는 내 안의 잘못된 지식과 오해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교정해 주었다.]

사람마다 책을 보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대1때 어설프게 시집을 좀 사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때 샀던 책들은 100% 책이 위쪽처럼 깨끗하다. 책에 손을 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씩 꽤나 멋있는 구절들은 줄을 그어놓았다가 써먹기도(?) 했었다. 그즈음에 소설책도 잠깐 봤다. 하지만 역시 인간 자체가 까칠과 회의론(Skepticism : 현실주의의 정서적 출발점.)으로 무장되기 시작하던 나에겐 그런 문학적 서적들은 즐겨보는 책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여느 젊은이들이 쉽게 허망한 이상론에 선동되듯이 좌파지식인들의 호소력 강한 목소리에 이끌려서 한동안 그들의 사상에 심취한 적이 있다. 현실적 측면을 도외시한 채, 언제나 도덕적으로 善과 막무가내식으로 약자의 입장에만 서려 하는 그들의 감성적 어프로치는 조금씩 나에게 "그 다음에는 어쩔건데?"라는 질문을 하게 했다. 그들의 대답은 뻔한 '공자님 말씀' 아니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는 자신들의 나약함에 대한 '자포자기' 뿐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책을 읽을 떄는 위쪽처럼 깨끗하게 읽었다. 때문에 그 시절 책들은 거의 새 책처럼 깔끔하다. 엄밀히 말해서 굳이 줄을 그어가며 읽을 만큼 강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좌파지식인들의 공통점은 쉽게 드러나는 보수우파 성향의 집권층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소챕터 제목만 봐도 대충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대충 느껴질 정도로 그들의 글은 선명하고 선이 굵다.


하지만 세상은 항상 강자만 승리하는 것도/약자만 패배하는 것이 아니듯이, 보편적 가치에서의 善이 반드시 善으로서 존재하지 않을 때도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선량한 善人을 살해한 惡人을 처형하여 사회정의를 실현하자는 사형제에 대해 비판하며 막된 표현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삐뚤어진 주장'들이 횡행한다. 자본주의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신자유주의가 엄청난 리스크를 품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조의 피해자에 선진산업국/개발도상국 구분없이 모두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피바람에 열광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는 그리 도덕적이지 않으며 반드시 도덕적이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에서 출발한 나의 이념적 우향우는 나름의 단편적 틀을 만들어 내는데에 와 있는 듯 하다.

비도덕적인 혹은 비도덕적이면서 필요에 따라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다수 보수우파의 특징인 '더러운 정의(혹은 '오염된 정의'라고 나는 보수우파의 정의를 호칭한다.)'를 고집/아집이 아닌 논리가 되기 위해서는 이상론자들의 이야기에 비해 상당히 꼼꼼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느낀 듯 하다. '도덕적 약자'에서 출발하는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의 '오염된 합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익은 밥처럼 떠먹어도 전체적인 논조를 이해시키는데에 큰 무리가 없는 이상론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예를 들면 김장수 국방장관이 자이툰 부대 파병연장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하면 그는 아마 그 '까닭'에 대해서 필요성을 느끼고 있겠지만, 군인의 상명하복식 사고패턴에 젖은 그는 자신에게 질의하고 반문(말대꾸)하는 상황에 익숙치 않아 그 '까닭'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보수우파가 가진 유일무이한 약점이자 가장 큰 약점인 도덕적 취약성은 책에 줄을 그으며 꼼꼼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던 것 같다.


나는 내 책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 책을 빌려간 사람은 단 1명 뿐이다. 난 내가 책을 읽을 만한 환경이 되었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책을 펼치지 않기에 내가 읽는 책을 남에게 보여줄 일도 거의 없다. 때문에 지금의 나에게 책에 줄을 긋는 것은 초등학생 때 부모님에게 공부한 흔적을 검사(?) 받기 위해 아무 생각없이 긋는 그런 줄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줄을 몇 년동안 계속 긋다 보니, 이제는 조금씩 그어지는 줄의 숫자가 줄어든다. 조금씩 개념이 정리가 되어지면서 하나둘 예전 같으면 그어졌어야 할 줄이 그어지지 않고 넘어가게 된다. 장하준 교수의 책은 딱 그 꼴(?)이다. 왠만해서는 책에 줄을 그을 필요가 없다. 너무나 많은 점에서 비슷한 틀을 잡고서 그가 세부적인 사항을 지적하며 알려주기 때문에 특별히 새롭게 무언가를 익히려고 노력할 필요가 적다. '익숙해짐'이 느껴지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다만, 내가 그 '익숙해짐'을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활용할 길이 완전히 막혀 있음에 한숨이 나올 뿐.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프로이트 철학에 담긴 오류'를 탐구하며 독서했던 사람이 아니라, '영어 단어를 한 개'라도 더 알고자 TOEIC/TOEFL책을 폈던 사람들과 골방에서 '법전' 구문을 달달 외우던 사람들이다. '이성'과 '합리'는 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덕목이 아니다. 그저 외침만이 존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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