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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와 함께 한 아침.

'하루의 일정은 한 사람(한 집단)하고만 보내는데 사용한다'라고 하는 나 나름의 철칙 아닌 철칙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본의 아니게 두 탕을 뛰게 되었다. 두 탕을 뛰게 되면 두 사람(두 집단) 모두에게 소홀해지게 되고, 나는 내가 누군가를 소홀히 만난다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그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사람에게만 집중하길 원하고 시간에 쫓겨서 원치 않거나 준비되지 않은 시간에 만남을 종료하는 것이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밤에 본의 아니게 두 탕을 뛰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이 쪽에서도 놀고 있는데, 다른 쪽에 있던 친구 무리들이 조인트(?)을 요구(요구다. 요청이 아니라.)하게 되면서 1.5탕쯤 되는 상태에서 첫번째 맴버들이 귀가하면서 두 탕이 되었다. (매우 애매한 계산법이군.) 차도 목적지에서 꽤 먼 곳에 주차해 놓고서 친구들과 길을 오래 걸었던 덕택에 본의 아니게 오늘 아침에 2시간 밖에 안자고 일어나니 콧물과 기침이 아주 인정사정없이 쏟아진다.

오늘 조금 멀리 다녀 오기로 되어 있는데, 잠을 적게 자서 약간 걱정이 된다. 새벽 3시쯤에 잠들었는데, 꿈자리가 좋지 못해서 5시에 깨고 말았다. 깨고 나서는 땀을 흘린 탓인지 잠도 오질 않아서 그냥 컴퓨터를 켜버렸다. 어영부영 씻고 나서 앉아 있으니 어머니께서 미역국 대신에 소고기국을 해주셨다. 나도 맛없는 미역국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소고기국이 훨씬 낫다. 간소했지만 나름대로 맛난 27주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 인생에서 홈런은 언제쯤 터질까? 하긴.. 난 슬러거 스타일보다는 RBI Machine 스타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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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다시 생각나는 그 날..

오래간만에 외박을 하고 돌아와서 그런지 몸이 내 몸 같지 않고 허리도 뻐근해서 거실의 발코니쪽 칸막이 창(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을 열고 전기렌지에 은박지를 깔아서 양념돼지고기를 구워 먹으며 TV를 봤다. TV라는 매체와 그다지 친근하지 않은 탓에 내가 보는 TV프로그램은 개그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 그리고 '게임방송' 뿐이다. 이번에 스타리그 결승전이 11월의 어느 날에 펼쳐지는데 그 날짜가 참 아무 의미 없으면서도 많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날로서 내게 다가왔다.

* * * * * * * *

그 날은 내가 대학입학을 위한 시험을 쳤던 날이다. 그 해 수능시험을 앞두고 2차례나 병원에 장기입원을 하며 수술을 하여 성적이 왕창 떨어져서 재수를 한다고 책에서 손을 놓고 몇 달을 방황을 하다가, 무슨 아쉬움 탓인지 마지막 한 달도 안남은 시간동안 간신히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몇 글자 보고서 시험을 쳐서 그냥 그 점수에 맞춰서 대학에 진학했다. 원래 하고 싶었던 것과는 전혀 무관한 대학과 학과에.

지금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그 때 정말 재수를 했거나, 아프지 않아서 수능을 잘 치뤘다면 아마 지금쯤 나도 최근 농성을 벌이고 있는 교대생 파업전선에 뛰어들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지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왜냐하면 21살까지의 나는 지금 돌이켜 보건데 어떠한 문제의식도 탐구의식도 없이 정해진 루트를 아주 잘 따라가는 모범생 타입이거나 순종형의 그런 타입이었고 지금의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형 중 하나였다.

* * * * * * * *

맘에 들지 않았던 대학이었지만,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이성관계라는 것은 학교가 너무 가고 싶어지는 곳으로 만들었다. 고교생 때만 해도 기껏 즐기는 유희라고 해봐야 오락실에서 King of Fighters라는 게임을 하는 것 뿐이었는데도 그것에 너무나 만족해 하던 단세포적인 나는, 나와는 다른 性을 가진 사람과의 관계가 이토록 흥분되고 즐거운 것이었는지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그런 존재였다. 고2때 이웃의 여고와 5:5 미팅을 하는데 나가자고 애들이 제의했을 때도 단호히 거부하면서 내가 왜 그 애들을 만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그런 순진무구한 애였으니까.

* * * * * * * *

한 여자를 만났다. 소위 말하는 요조숙녀 타입이랄까. 내면은 좀 복잡다양한 그런 사람이었지만, 겉으로 풍기는 이미지와 언행은 요조숙녀의 전형이라고 해도 될 법한 그런 여자였다. 자기 관리를 참 잘하는 애였으니.
어느 날 그녀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녀는 내가 너무 답답했던지 '순진빵'이라고 구박을 했다. 아마도 윗단락에 있는 저런 무지한 모습들에게서 오는 답답함이었으리라 여겨진다. 그 애 앞에서는 항상 버벅거리고 어리벙한 모습의 풋내기였던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리다가 순간 머릿 속에 번뜩였던 당시 TV에서 광고를 하던 '국찌니빵'이 생각나서 "얼른 커서 국찌니빵이 될께."라고 대답해서 그녀의 어이없는 웃음을 유도하여 제법 위기를 잘 모면(?)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주변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발랑까진 녀석 중 한 명이 된 나에게 다소 어울리지 않았던 소시적 모습이다.

* * * * * * * *

하필 그 해 내가 친 수능과 그녀가 함께 오버랩이 된 까닭은 그 게임방송의 스타리그 결승이 하던 날이 3가지가 모두 같은 날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수능을 친 날은 그녀가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 때의 나는 앞으로 내가 다시 할 수 없을 수준의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그녀에게 품고 있었다고 되새겨 본다. 때문에 가장 오랫동안 목을 매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되새김질해 본다. 지금은 다른 여인에게 호감을 품고 있지만, 얼굴을 못본지도 몇 년된 그녀가 이즈음만 되면 떠오르는 까닭은 지금의 내가 그 때만큼 열정적이고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없는 더럽고 때묻고 오염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나는 아마 지금도 앞으로도 다시는 그녀에게 했던 것만큼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다시 다른 여인에게 쏟아낼 자신이 없다. 속물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여인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나의 머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부인할 것이다. 나 스스로 나의 치부를 감추고 나를 합리화하려는 작업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나를 정화하고 필터링하는 것에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슴'은 안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다시는 그런 날들이 올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슬프다.

Vince Guaraldi Trio - Never, Neverland
[Vince Guaraldi Trio,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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