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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지성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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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지성은 구조적으로 하향평준화하게 되어 있다. 집단지성은 집단의 조직구성원이 비교적 불규칙적이며 비일관적인 사회의식과 사회적 계급을 가진 채 형성되기 때문에, 쉽게 공감대를 만들어내기 어렵고, 조직을 리드할 능력을 가진 엘리트의 존재를 기득권 진입에 실패한 낙오자쯤으로 인식(실제로도 그러하며)하며 쉽게 인정하려들지 않기에 집단지성에 의지한 지성(?)의 창출은 구조적 결함과 그로 파생되는 한계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하향평준화가 '저항의식'마저도 제대로 힘을 결집시키기 힘들기에 '진일보를 위한 후퇴'가 아닌 '자신의 사회적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트랜드'로 변질시키며, 저항이 저항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왜곡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왜곡된 저항'은 그들이 지목한 '저항의 대상'에게 생존의 빌미를 제공하고, 높은 도덕적 가치를 요구하는 집단지성의 저항 세력에게는 자멸적 환경이 단계적으로 조성되어 결국 와해되어 간다. 최초 노정권 시절 反FTA집회 불법화에 대한 저항이나, 쇠고기 협상에 대한 저항이 '저항 자체가 밥벌이인 조직들'에 의해서 그들의 지지 기반인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하기보다, 그들의 존재 가치를 연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저항을 악용하기 때문에 집단의 저항의지를 약화/이탈시키며, 이를 재결집하는 과정에서의 조직력 동원이 악순환을 반복하며 최종적으로 대중피로현상과 대중의 조직이탈이 가속화된다. (그러나 저항 세력은 결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그 왜곡된 저항은 생명력을 다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저항의 대상 세력의 대응[각주:1]이 저항세력의 대중이탈에 시너지 효과를 보이며 결국 저항 세력은 대중의 지지를 상실한 채, 저항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조직만의 집안잔치로 전락하여 그들의 이상과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사용 가능한 격화된 저항 수단을 발휘하며 최종적으로 대중적 지지를 상실하며 와해된다. 대중을 볼모로 하는 노동쟁의[각주:2]나 기득권을 대상으로 한 계급투쟁[각주:3], 결국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높이기 위한 저항의 확전(擴戰)으로 자멸의 길을 걷고 있는 (과거의 대중참여가 놀랍도록 제거된 채,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린 현재의)촛불시위의 잔여 세력 등이 이러한 범주에 속할 것이다.

만약 저항 세력이 장기적 의미에서 '정의'라면 저항 세력의 패배는 국가적/국민적 저력이 미약함이자 변화에 대한 요구를 할 자격이 없음을 뜻한다. 저항 세력이 장기적 의미에서 '불의'라면 저항 세력의 패배는 국가적 국민적 저력이 성숙하며 부당한 요구에 대한 이성적 의식이 성숙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강한 것은 반드시 정의'라고 주장하면 무리수가 따르지만, '살아 남는 것은 반드시 정의'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진리에 가깝다. 인류의 역사는 그것을 증명한다.


집단지성은 반드시 패배한다. 집단지성의 패배는 숙명이며 철칙이다. 하지만 그 집단지성은 결집할 때마다 그 지적 수준이 향상되어 간다. 이 주장에 대한 단서는 국가와 국민이 일정한 궤도 이상[각주:4]에 이르렀을 때 이야기이다. 집단지성이 시간의 흐름 만큼이나 안정적으로 '집단지성의 최저점'을 향상시키는 만큼, 집단지성이 '패배하는 지점'은 상승하고, 그러한 단계적 발전과 상승은 자연발생적/사회통합적 발전과 진화를 유도한다. 그것이 느리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것은 집단지성과 그 집단지성을 구성하는 대중의 저력이 미력한 것일 뿐이다. 1970년대의 한국민은 군부독재의 유신체제를 막을 수 없었지만, 2008년의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도,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1970년대 한국민의 집단지성의 저력과 2008년의 한국민의 집단지성의 저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집단지성의 '현명한 승리'는 없다. 하지만 집단지성은 끊임없이 현명히 승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집단지성의 승리는 결코 돌이켜지지 않는다. 다만, '어리석은 집단지성'이 그것을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때문에 집단지성은 오늘도 끊임없이 그 태생적 어리석음과 씨름하며 끊임없이 숙명적 패배에 빠진다.


P.S. : 블로그 이웃의 글에 트랙백을 넣으려다가, 그냥 독자적인 글로 남겨 둔다. 그가 이것을 보게 된다면, 그에게 전하는 메시지 임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얼음구름, Against All Odds..

  1.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 '현상타파'를 시도하는 저항 세력은 대체로 구체제를 혁파하여 신질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집단으로 비춰질 소지가 있다. 그러나 어떠한 조직도 완전히 이타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저항 세력 또한 그러하다. 때문에 저항 세력은 국가적/사회적으로 단/중장기적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세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는 저항 세력의 '저항의 대상 세력'에게도 해당된다. 정의가 정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의 가치평가가 완전해질 수 있는 시기에 이르러서 뿐이다. [본문으로]
  2. 대표적으로 대중교통/의료 노조 혹은 특정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촛불시위의 저항행위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저항행위에 대한 집단지성과 대중의 인내력은 매우 취약하며 대중과 집단지성은 자신들을 볼모로 한 저항 행위에 대해 지지하는 것에 대해 인내심이 부족하다. [본문으로]
  3. 노조의 투쟁이나, 얼마 전 붐을 일으켰던 광장촛불시위를 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정의는 저항의 목적이 얼마나 많은 집단지성과 대중의 대표성을 띄고 있느냐가 핵심이며, 또 그러한 대표성을 띄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와 국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긍정적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명확히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다. 모든 가치판단은 역사적 안목에서 접근되며 시기와 시각에 따라서 얼마든지 가치판단은 변화하고 왜곡된다. 때문에 이러한 저항행위는 고른 지지를 받기 힘들다. [본문으로]
  4. 민주주의 불패론에서 일반적으로 GDP 5천 달러를 돌파하는 수준을 군부 쿠데타가 성공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가 장기적으로 퇴보하지 않는다고 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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