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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사건들

['뉴라이트' 배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사건들이 바로 사회주의 독재정권에서의 자아비판에서나 있을 법한 일종의 사상검증적 접근이다. 나 또한 이것을 즐긴다까지는 아니어도 종종 이용하는 편이며 이러한 행위는 특정 개인과 집단의 성향과 노선을 파악하는데 거시적인 측면에서 꽤나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 사상검증 이후의 개인, 조직에 대한 판단작업에서 그러한 약간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감내하는 노력의 결과물을 어느 정도 제공한다.

이번에 또다시 사상검증의 대상이 된 조직은 뉴라이트다. 합리적 보수이니, 신보수이니 말을 하고 있지만, 나는 '보수적이다'라는 표현에 이념과 논리적 접근을 가하여 이상적, 논리적 신념을 만들어 대중을 선동하고 육성하는데 열중하는 소위 진보좌파라고 불리는 세력에 대한 어설픈 대응으로 낮게 평가하는지라 그들의 활동목표 자체를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자칭 신보수의 '보수에 대한 지침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 중 하나가 자칭 진보좌파들이 저지르는 여러 '사상검증성 갈등'처럼 문제가 커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뉴라이트의 교과서 편찬 관련자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성공한 반란은 혁명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라는 인류사 속에서 경험적으로 우러나온 보편적 접근을 21C의 수준급 산업국가인 한국에서 인정받길 바랬나 보다.

적어도 인류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성공한 반란은 모두 하나의 왕조, 정권으로서 인정 받아 왔고 역사책의 한페이지씩을 차지하고 있다. 분명 그들의 시각에서 그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성공한 민중반란이었던 4.19는 4.19 혁명으로서 존재하고 있지만, 실패한 민중반란이었던 5.18은 혁명이 아니라 민주화운동/항쟁 등으로 다소 격이 떨어지는 표현을 쓴다. 여기에 좀 더 역사책에서 나올 법한 사례를 끌어들여 보자면, 천하만민이 평등하니 인간을 억압하는 신분제는 부당하다고 하는 오늘날의 인간평등 혹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주장하고 난을 일으키려 했던 최충헌의 노비 만적의 반란은 실패한 까닭에 지금도 '만적의 난'이라 불리는데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하다. 대륙수복의 웅대한 꿈(오늘날의 이 정권이 좋아하는 자주적 기치)을 꾸며 서경천도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지금도 '묘청의 난'일 뿐이다. 가장 극적인 예로서 구설되고 있는 프랑스혁명 과정에 있었던 베르사유 궁전 왕궁호위대와 루이 16세의 대화에서 '반란인가 혁명인가' 하는 논쟁(?)도 결국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 동안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가치관에 의해서 쓰여졌다. 때문에 프랑스혁명은 '혁명'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단순한 반란이 아닌 민족적 정통성을 가지는 (故조선과는 다른)이성계의 조선을 통해 정통성을 얻을 수 있었다. 박정희 군부의 반란행위도 그들의 직계들이 한국을 통치할 때는 군사혁명이 되었지만, 그들의 적성 세력이었던 자들이 집권하자 한순간에 516군사반란 혹은 군사정변(왠지 나는 '정변'이라고 하면 느낌이 좀 이상하다.)으로 격하되었다.

단지 그 뿐이다. 나는 그것을 말하고 싶다. 단지 그들이 승리자이기 때문에 군부가 승리자일 때 자신들의 역할을 자신들이 재단했듯이, 지금은 그들에 맞춰서 재단되었을 뿐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군부가 승리했을 때는 국민소득 80달러와 실업률 30%이상에 허덕이며 높은 문맹의 무지몽매한 국민들로 넘쳐나는 그런 대한민국에서 경제발전 하나에 모든 것을 쏟아부터 세계에서 유일한 경제발전에 성공한 군사정권이라는 이정표로 자신들의 정치적/사회적 치부를 가리려 했던 것처럼 국민소득 1만 4천 달러에 문자해독률 세계 5위권에 민주주의적 가치가 주입된 대학교육을 수료한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21C의 한국에서 과거의 가치와 평판은 단지 '유행이 지나간 옛노래'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것을 억지로 다시 유행시키려고 이수만급 매니지먼트社를 고용한다고 해서 다시 유행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노력 자체가 그나마 그 때 그 시절 그들이 쌓아올린 한 분야의 금자탑이 가지는 가치를 퇴색시키고 평가절하하게 만들 뿐이다. 자기 자신을 어릿광대로 만드는 멍청하고 아둔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보수적이다'라는 가치는 결코 좌파적 논리처럼 정형화되기 힘든 특수성이 있다. 왜냐하면 진보적/좌파적/보수적/우파적/무정부적 가치관을 가진 모든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두 개 이상의 가치관이 혼재된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단지 '보수적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들 속에서 군계일학의 우월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가장 '인간의 본능'에 충실하고 있고 결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모든 인간들이 마음 한켠에 추종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욕구충족이라는 가치들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유토피아를 꿈꾸는 진보적/좌파적 논리보다 강한 대중적 파괴력을 가질 수 없다. 모두가 그것을 원하면서도 그것을 밝히기 주저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들의 추악함을 스스로 거세하기 위한 몸부림인 (특정한)종교의 가치관을 도입하고 그것을 내재화하려는 '보수적이다'라는 가치관의 일부에 속하는 어느 집단의 시도 자체가 '선망의 대상은 아니지만, 가장 보편적인 자신'을 왜곡시키고 더 우스꽝스럽고 보편적이지 않은 최홍만의 몸에 걸친 이효리의 탱크탑 같은 꼴을 만들어 버린다. 보수적이다 라는 광범위한 스펙트럼의 일부를 표방하는 한 조직의 과거왜곡 미화작업은 그래서 더 우스꽝스럽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을 두고서 2개 이상의 평가를 용인하지 못하는 옹졸한 사회문화를 가진 한국적 특수성을 경험적으로 깨달았다면 단지 시간의 흐름 속에 다양한 평가가 갈등되고 변화/진화하여 내려질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 했다.


한국의 '보수적이다'라는 스펙트럼에 속한 사람들은 기회이자 위기를 맞았다. 자신들 이외에는 위력적인 대안이 없던 시대에서 벗어나 심지어 자신들을 꺾기조차 하는 새로운 대안을 만났기 때문이다.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은 자기발전의 동력이고 그러한 동력의 창출은 사회 발전의 동력이라는 순기능으로 작용할 때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이해와 관용이 없거나 부족한 한국적 토양에서 이러한 강력한 두 세력의 빅뱅은 사회의 무한분열과 끝없는 갈등만을 초래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상검증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져서 21C초반을 살고 있는 1960년대와는 다른 이 정도 수준의 사고체계를 가진 한국인들의 의식세계를 가볍게 흔들어 댄다. 서로 자신만이 정의라고 주장하며. 한국은 아직도 '이러하다'라고 형용할 수 없는 청소년과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다.


Hedge™, Against All Od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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