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즈음에 쓰다가 멈춘 글이어서 광복절 얘기가 조금 있다. 그냥 미리 썼던 본문은 별로 고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둔다. 어쩌면 글을 쓰면서 힘들었고 많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이 간단한 결말을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가. 글이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결론을 적절하게 유도하는 것이 힘들었다.]
요즘은 세상이 많이 변해서인지 광복절이 다가오자, 광복에 대한 이야기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물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이 한국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을 다루면서 일본을 '피해자'로 묘사하는 일부 언론과 국제 여론의 세몰이에 엄청난 거부감과 환멸을 느낀다. 그리고 역사는 강자의 편이며 강자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재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재확인한다.
인류의 모험, 원자폭탄의 실전 투하
제2차 세계 대전은 45년 5월 히틀러의 패망과 미드웨이 해전 이후 급격히 기울어진 태평양 전쟁의 전세로 인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일본군의 주요 거점들은 대부분 미군에 의해서 탈환되었고, 일본의 조선 능력과 전투기 제조 능력(미쓰비시社 같은 전투기 제조업체. 미쓰비시가 전투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약간 충격을 받았었다.)으로는 더이상 미군의 전투기와 군함에 호적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카미카제, 사쿠라바나 등으로 지칭되는 신민적(臣民的) 항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이미 기진맥진하고 있는 일본의 전투력을 판단하는 객관적인 안목을 흐리게 하였고, 美보고서는 '미국이 일본 본토를 재래식 무기로 점령하려면 50만명 수준의 희생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라는 전쟁으로 지칠대로 지친 트루먼 행정부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적인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에 미국은 서부전선을 마치고 재정비에 들어간 소련에게 대일전(對日戰) 참전을 요청하나, 소련은 손안대고 코풀 요량으로 시기를 조율하느라 연해주 일대 반환을 요구하며 참전 일자를 차일피일 미룬다. 소련의 미적거림에 속이 타던 트루먼 행정부는 비밀리에 실시된 핵실험 성공을 보고 받자 소련과의 협상을 중단하고 태평양 전쟁의 조기종결을 위한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한다. 하지만, 이 결정이 2차 대전의 가장 치명적이고 가장 악독한 전범국 일본을 오늘날 피해자로서 둔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리라고는 (더구나 그러한 주장이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3000명 이상의 희생을 보며 지독한 일본군과 고군분투해온 군대의 모국인 자국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트루먼 자신을 포함해서 트루먼 행정부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왜곡되어 버린 전쟁의 역사
필리핀 남쪽 몇백Km 떨어진 곳에 가면 '팔라우'라고 하는 섬나라가 있다. 섬 전체에서 가장 높은 지대가 해수면 2m일 만큼 낮은 평지로 되어서 있어서 해일이 한 번씩 올 때마다 국토의 대부분이 바닷물에 쓸려 버리는 나라이며, 얼마 전에도 국토의 60%가 해일에 쓸려서 팔라우 대통령이 국제사회에 구호를 요청한 적이 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나라가 있는지도, 그런 이름 모를 나라에서 국제사회에 구호를 요청한 적이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현실이며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참고로 팔라우는 현재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파병한 참전국이다.]
이 남태평양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섬나라 '팔라우'도 일본의 '大東亞 공영권' 논리에 의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지낸 아픈 역사가 있다. 지금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연합군의 우방국으로 연합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팔라우의 주민들은 한국보다 훨씬 짧은 식민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지금도 일본과 일본인을 극히 증오하고 거부 반응을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군위안부, 731부대의 생체실험, 난징 대학살, 만주사변 등은 단지 '우리가 관심이 있는 사건들(이게 이 글의 주제다.)'일 뿐, 일본의 식민 전쟁과 차마 인간이라 볼 수 없는 만행들은 그 목차를 뽑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하지만 이런 비극의 전쟁사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부에서는 자신들이 전쟁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상당한 설득력을 얻은 채, 그 목소리를 점점 더 높여가고 있다. 그러한 주장의 주된 논리는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반인류적이고 무차별적이며 무계획한 핵무기의 유일무이한 피폭자라는 것이며 미국은 반인륜적인 무기를 통해서 10만명이 넘는 민간인을 살상했고, 그 중대 '범죄'의 심판을 아직까지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범세계적으로 反核단체와 인권단체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그들를 통해서 점차 세력을 부풀리고 있다. 6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이 '악독한 전범국'를 '선량하고 무고한 희생자'로 변모시킨 것이다.
누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이 글을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가장 주된 메시지다. 누가 우리(굳이 한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미국? 중국? 아니면 전범국 일본? 그들에게, 우리 고통의 원흉인 섬나라 쪽빠리 왜구들에게 우리의 고통을 이해해 달라고 하기엔 너무 어려운 일 같다.
지금 많은 국제기구와 민간 단체들은 전범국 일본에 떨어진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인해 죽은 자들의 희생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하지만,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한국이나 난징 사태와 731부대의 생체실험에 가장 많이 희생된 중국인, 일본제국주의 최후의 광기에 무참히 희생된 동남아시아의 소국들의 고통은 여전히 그들의 관심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듯 하다.
어쩌면 그들 국제 기구와 NGO들은 겉으로는 비정치/비영리를 추구하지만, 그들이 안고 있는 재정적 한계로 인해서 그들에게 헌금을 좀 더 많이 할 수 있는 집단과 민족의 편을 들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뜻 있는 참중도의 입장에서 '진정한 희생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고독한 외침을 호소하는 작은 목소리는 일본과 그 유사한 집단들의 기부금을 잔뜩 받은 그럴 듯하고 인지도 높은 단체들의 호소력 강한 일갈(一喝)에 철저히 묻혀져 버리는 지도 모른다. 우리의 종군위안부나 징용 근로자, 강제징병자들의 피와 눈물은 국제 사회는 고사하고 일본 심지어 우리 나라에서조차 광복절 언저리에서 1회성을 띤 이벤트 속에서 잠시 국민들의 동정심과 여린 감성을 자극하고선 그 약발이 떨어질 무렵이면 조용히 1년간 다시 잊혀진다.
힘있는 국가만이 인정 받는 정의가 되는 세계
얼마 전에 '한국은 핵이 필요한가'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서 토론한 적이 있다. 결론은 NPT와 CTBT가 발효되고 인정 받고 있는 현재의 국제 사회에서 '핵이 과연 전략적으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핵주권/미사일주권과 같은 것들보다 우세한 가운데 이야기는 끝이 났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마음 한켠에서 '왜 우리는 강해지고자 정진하면 안되는가?', '왜 우리는 타국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토론 시간 중에 내가 거의 즉흥적으로 내린 결론은 '우리가 부유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국가적 레벨에서 '강함'이란 결국 '부유함'에서부터 파생되는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제2차 대전 이후 처참히 파괴된 일본과 독일이 오늘날 이토록 강대국으로서 부각되고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선진국 대열 중 하나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은 미국의 마샬 플랜(서유럽 부흥정책)과 對공산주의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의 일환으로 실행된 동아시아 전략방위의 일환으로 일본에 퍼부어진 미국의 지원 때문이었다. 결국 세계의 죄인으로서 나약했던 그들은 당시 세계를 양분한 두 패권국의 대립의 필요에 따라 전략적으로 육성되었고 그 결과 부유하게 되었다. 그들의 부유함은 '군사적 강대함'으로 이어지고 그로서 그들은 그들의 과거를 그 부유함으로서 씻어 나가고(또는 희석시켜 가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어느새 UN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달라고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의 존재와 같은 추악한 모습을 내재하고서도 그들은 그들의 부유함과 강함을 통해 자신들의 정의를 관철시키며 세계 각국의 지지를 받고 있다.
결론은 명확하다.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세계인에게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알리며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부유해지는 것이다. 부유함이 전제되어야 강함이 이룩될 수 있고, 그 속에서 '우리의 정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인류보편적인 정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일부에서 미국이 (악독한)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전쟁이 명분이 없다느니, '악의축(Axis of Evil)' 발언이 일방적인 독트린에 불과하니,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부당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이 역사왜곡이라고 아무리 떠들어 봐야 결국 국제 사회는 강하고 부유한 국가의 지배논리를 따르게 되어 있다. 우리가 세계인들에게 (어떠한 형태로든지 간에 ) 이익을 줄 수 있는 입장이 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검은 대류 아프리카에 몇 십년째 만연한 기아와 약탈, 살인, 방화, 인종청소, 군부 독재를 외면한 채, 자신들이 사랑하는 애완동물을 버리는 것에 유기견의 생존권을 주장하며 열변을 토하고 고양이 머리에 박힌 대못에 격분하면서도 지하철 역사에 널부러진(?) 노숙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것과 같다. 가난한 국가의 국민은 부유한 국가의 길거리에 버려진 개보다도 못하다. 다만 그들 부유한 국민들 스스로만이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세계는 나에게 이익을 줄 수 없는 세계에 대해 한없이 냉정하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요즘은 세상이 많이 변해서인지 광복절이 다가오자, 광복에 대한 이야기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물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이 한국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을 다루면서 일본을 '피해자'로 묘사하는 일부 언론과 국제 여론의 세몰이에 엄청난 거부감과 환멸을 느낀다. 그리고 역사는 강자의 편이며 강자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재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재확인한다.
인류의 모험, 원자폭탄의 실전 투하
제2차 세계 대전은 45년 5월 히틀러의 패망과 미드웨이 해전 이후 급격히 기울어진 태평양 전쟁의 전세로 인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일본군의 주요 거점들은 대부분 미군에 의해서 탈환되었고, 일본의 조선 능력과 전투기 제조 능력(미쓰비시社 같은 전투기 제조업체. 미쓰비시가 전투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약간 충격을 받았었다.)으로는 더이상 미군의 전투기와 군함에 호적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카미카제, 사쿠라바나 등으로 지칭되는 신민적(臣民的) 항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이미 기진맥진하고 있는 일본의 전투력을 판단하는 객관적인 안목을 흐리게 하였고, 美보고서는 '미국이 일본 본토를 재래식 무기로 점령하려면 50만명 수준의 희생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라는 전쟁으로 지칠대로 지친 트루먼 행정부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적인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에 미국은 서부전선을 마치고 재정비에 들어간 소련에게 대일전(對日戰) 참전을 요청하나, 소련은 손안대고 코풀 요량으로 시기를 조율하느라 연해주 일대 반환을 요구하며 참전 일자를 차일피일 미룬다. 소련의 미적거림에 속이 타던 트루먼 행정부는 비밀리에 실시된 핵실험 성공을 보고 받자 소련과의 협상을 중단하고 태평양 전쟁의 조기종결을 위한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한다. 하지만, 이 결정이 2차 대전의 가장 치명적이고 가장 악독한 전범국 일본을 오늘날 피해자로서 둔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리라고는 (더구나 그러한 주장이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3000명 이상의 희생을 보며 지독한 일본군과 고군분투해온 군대의 모국인 자국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트루먼 자신을 포함해서 트루먼 행정부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왜곡되어 버린 전쟁의 역사
필리핀 남쪽 몇백Km 떨어진 곳에 가면 '팔라우'라고 하는 섬나라가 있다. 섬 전체에서 가장 높은 지대가 해수면 2m일 만큼 낮은 평지로 되어서 있어서 해일이 한 번씩 올 때마다 국토의 대부분이 바닷물에 쓸려 버리는 나라이며, 얼마 전에도 국토의 60%가 해일에 쓸려서 팔라우 대통령이 국제사회에 구호를 요청한 적이 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나라가 있는지도, 그런 이름 모를 나라에서 국제사회에 구호를 요청한 적이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현실이며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참고로 팔라우는 현재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파병한 참전국이다.]
이 남태평양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섬나라 '팔라우'도 일본의 '大東亞 공영권' 논리에 의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지낸 아픈 역사가 있다. 지금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연합군의 우방국으로 연합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팔라우의 주민들은 한국보다 훨씬 짧은 식민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지금도 일본과 일본인을 극히 증오하고 거부 반응을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군위안부, 731부대의 생체실험, 난징 대학살, 만주사변 등은 단지 '우리가 관심이 있는 사건들(이게 이 글의 주제다.)'일 뿐, 일본의 식민 전쟁과 차마 인간이라 볼 수 없는 만행들은 그 목차를 뽑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하지만 이런 비극의 전쟁사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부에서는 자신들이 전쟁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상당한 설득력을 얻은 채, 그 목소리를 점점 더 높여가고 있다. 그러한 주장의 주된 논리는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반인류적이고 무차별적이며 무계획한 핵무기의 유일무이한 피폭자라는 것이며 미국은 반인륜적인 무기를 통해서 10만명이 넘는 민간인을 살상했고, 그 중대 '범죄'의 심판을 아직까지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범세계적으로 反核단체와 인권단체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그들를 통해서 점차 세력을 부풀리고 있다. 6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이 '악독한 전범국'를 '선량하고 무고한 희생자'로 변모시킨 것이다.
누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이 글을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가장 주된 메시지다. 누가 우리(굳이 한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미국? 중국? 아니면 전범국 일본? 그들에게, 우리 고통의 원흉인 섬나라 쪽빠리 왜구들에게 우리의 고통을 이해해 달라고 하기엔 너무 어려운 일 같다.
지금 많은 국제기구와 민간 단체들은 전범국 일본에 떨어진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인해 죽은 자들의 희생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하지만,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한국이나 난징 사태와 731부대의 생체실험에 가장 많이 희생된 중국인, 일본제국주의 최후의 광기에 무참히 희생된 동남아시아의 소국들의 고통은 여전히 그들의 관심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듯 하다.
어쩌면 그들 국제 기구와 NGO들은 겉으로는 비정치/비영리를 추구하지만, 그들이 안고 있는 재정적 한계로 인해서 그들에게 헌금을 좀 더 많이 할 수 있는 집단과 민족의 편을 들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뜻 있는 참중도의 입장에서 '진정한 희생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고독한 외침을 호소하는 작은 목소리는 일본과 그 유사한 집단들의 기부금을 잔뜩 받은 그럴 듯하고 인지도 높은 단체들의 호소력 강한 일갈(一喝)에 철저히 묻혀져 버리는 지도 모른다. 우리의 종군위안부나 징용 근로자, 강제징병자들의 피와 눈물은 국제 사회는 고사하고 일본 심지어 우리 나라에서조차 광복절 언저리에서 1회성을 띤 이벤트 속에서 잠시 국민들의 동정심과 여린 감성을 자극하고선 그 약발이 떨어질 무렵이면 조용히 1년간 다시 잊혀진다.
힘있는 국가만이 인정 받는 정의가 되는 세계
얼마 전에 '한국은 핵이 필요한가'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서 토론한 적이 있다. 결론은 NPT와 CTBT가 발효되고 인정 받고 있는 현재의 국제 사회에서 '핵이 과연 전략적으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핵주권/미사일주권과 같은 것들보다 우세한 가운데 이야기는 끝이 났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마음 한켠에서 '왜 우리는 강해지고자 정진하면 안되는가?', '왜 우리는 타국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토론 시간 중에 내가 거의 즉흥적으로 내린 결론은 '우리가 부유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국가적 레벨에서 '강함'이란 결국 '부유함'에서부터 파생되는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제2차 대전 이후 처참히 파괴된 일본과 독일이 오늘날 이토록 강대국으로서 부각되고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선진국 대열 중 하나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은 미국의 마샬 플랜(서유럽 부흥정책)과 對공산주의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의 일환으로 실행된 동아시아 전략방위의 일환으로 일본에 퍼부어진 미국의 지원 때문이었다. 결국 세계의 죄인으로서 나약했던 그들은 당시 세계를 양분한 두 패권국의 대립의 필요에 따라 전략적으로 육성되었고 그 결과 부유하게 되었다. 그들의 부유함은 '군사적 강대함'으로 이어지고 그로서 그들은 그들의 과거를 그 부유함으로서 씻어 나가고(또는 희석시켜 가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어느새 UN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달라고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의 존재와 같은 추악한 모습을 내재하고서도 그들은 그들의 부유함과 강함을 통해 자신들의 정의를 관철시키며 세계 각국의 지지를 받고 있다.
결론은 명확하다.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세계인에게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알리며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부유해지는 것이다. 부유함이 전제되어야 강함이 이룩될 수 있고, 그 속에서 '우리의 정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인류보편적인 정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일부에서 미국이 (악독한)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전쟁이 명분이 없다느니, '악의축(Axis of Evil)' 발언이 일방적인 독트린에 불과하니,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부당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이 역사왜곡이라고 아무리 떠들어 봐야 결국 국제 사회는 강하고 부유한 국가의 지배논리를 따르게 되어 있다. 우리가 세계인들에게 (어떠한 형태로든지 간에 ) 이익을 줄 수 있는 입장이 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검은 대류 아프리카에 몇 십년째 만연한 기아와 약탈, 살인, 방화, 인종청소, 군부 독재를 외면한 채, 자신들이 사랑하는 애완동물을 버리는 것에 유기견의 생존권을 주장하며 열변을 토하고 고양이 머리에 박힌 대못에 격분하면서도 지하철 역사에 널부러진(?) 노숙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것과 같다. 가난한 국가의 국민은 부유한 국가의 길거리에 버려진 개보다도 못하다. 다만 그들 부유한 국민들 스스로만이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세계는 나에게 이익을 줄 수 없는 세계에 대해 한없이 냉정하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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