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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Victory Without Suffering.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걸맞는 정부를 가진다. // 사진은 클릭으로 리사이즈. by 얼음구름


웃기는 논리, 양심적 병역 거부

아침에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니, 신문 사이트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논란이 일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일이고, 나 또한 과거에 이와 같은 주제로 그들의 허무맹랑함과 그들이 가지는 보편적 일반인에 대한 혐오의식을 글로 쓴 적이 있어서, 그와 같은 감정적인 논지의 글은 또다시 쓸 필요 없을 듯 하다.


다만 지난 6월 28일 예비군 훈련을 갔을 때, 10명의 어이 없는 놈들이 6발의 M16A1 사격 훈련을 다른 300여명의 보통 예비군들의 따가운 눈총이 부담됐는지, 해당 조교나 교관들에게 아무런 보고 없이 거부하면서 잠깐 일행을 술렁이게 만들었던 점이 떠올라 간단하게 다시 한 번 지적하고자 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대표적으로 '여호와의 증인' 녀석들이 있다.)를 통해서 집총거부를 하는 자들은 '살생의 도구가 되는 것에 대한 거부'를 기본으로 한다. 그들은 살생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를 들고 하는 훈련을 거부한다는 것이 기본 주장이다.
이를 통해서 우회적으로 '그것(살상 무기)'을 들고 (자의든, 타의든 명령에 의해서)훈련하는 우리들을 잠재적 살인/살생자로 취급을 한다.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지만, 아무리 감언이설로 대중을 설득해도 행위의 가치 판단과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러한 종교적 이유로 집총거부를 하는 한, 그들의 논리는 분명히 우리를 잠재적 살인/살생자로 볼 수 밖에 없다.


종교의 속성은 '교세의 확산'에 있다. 인간의 나약함과 절대자에 대한 의지 욕구가 만든 종교는 마치 전염병처럼 인간이 아무리 없애고 싶어도 없애기 힘든 속성(?)이 있다. 오히려 억압하면 할수록 교인들의 믿음은 오히려 더욱 과감해지고 독실해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종교적 신념의 정당성과 그 신념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고 있음을 간증하고자 더더욱 혈안이 된다.

여기서 종교적 이유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앞선 지적에서 집총거부에 따른 일반인들이 훈련하는 것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음을 언론을 통해서 감언이설했지만, 그들의 그 신성한 믿음(?)과 종교적 구원에 사람들을 끌어 들이려면 집총을 통한 군사 훈련을 받은 그들을 수용해야 한다. 교세 확장 과정에서 교인 모두를 여자로만 채울 것이 아니라면 그들(성실한 병역 이행자)에게 일종의 고해성사가 필요하고 그러므로서 다시 한 번 우회적으로 국민개병제에 따라 정상적인 군사 훈련을 성실히 받는 병역 이행자들을 다시 한 번 욕되게 한다.


종교는 필연적으로 '구복적 성향'을 띄고 있다. 그것이 현세구복적이든, 내세구복적이든 종교란 본질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는데 정신적인 지지대가 되는 역할로서 교세를 확장해 왔고 모든 시대에서, 모든 종교에서 이러한 현세/내세구복적 성향은 그 정도의 차가 있을지 모르나, 반드시 내제되어 있다.

여기서 또 한 번 현실적인 문제 속에서 비타협적인 '종교적 사유의 병역거부자'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다른 어느 산업 국가(이러한 명칭은 아시아-아프리카의 수없이 많은 내전 국가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다.)보다도 안보적으로 심대한 위협을 받고 있는 한국의 특수한 대립적 상황 속에서 그들의 '집총거부'가 반사회적인 논리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들만의 구복'을 위해서 국민/민족이라는 압도적으로 큰 조직 단위의 결속과 단결을 해치는 이기주의적 집단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민주 국가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어제까지 교회에 다니다가도 내일 절에 나갈 수 있는 것이 종교의 자유다. 양심적 병역 거부를 목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가, 그들이 주장하는 소기의 '대체 복무[이 말도 참 웃긴 것이, 그럼 현역병을 출퇴근시키겠다는 건가? 설사 합숙하겠다고 하더라도, 왜 그들 때문에 그러한 사회적 부담(그들이 합숙할 수 있는 시설을 짓고, 그것을 유지하는 비용)을 추가적으로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가?]'가 채워지면 다시 무교인으로 돌아서거나, 자신들의 원래 종교로 돌아갈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20살 넘어까지 무교인으로 살다가, 원래 뜻이 있던 성경이 좋아서 교회를 다녔으나 교회 신자들의 예수실존에 대한 요구에 반발하여 '나는 성경만으로 이미 충분한데, 왜 예수의 실존을 요구하느냐'는 반발에 '예수의 실존을 믿지 않으면 예수를 믿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여 교회를 떠났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어졌다.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종교에 귀의하기 위해서는 이와 비슷한 경우가 분명히 벌어질 것이다.

이보다 앞서서 가장 본질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만약에만약에 혹시라도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종교적 유권해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무장하고 내려오는 적군을 향해서 평화의 소중함과 생명의 존엄함을 아무리 설법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체체니아 사태에서 체체니아 국민들이 러시아 군인들을 향해서 가족애와 정에 호소하는 전술을 펼쳤지만, 체체니아 테러리스트들과 체체니아 지역에 대한 집중 포격과 생화학 무기 사용 등은 아무 거리낌 없이 실행되었다.)


결국 이들은 앞서 여러 언론을 통해서 약속(?)했던 것들에 대해서 이행될 수 없는 공약(空約)을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도 성당도 절도 어디도 국가 안보에 걸림돌이 되는 교리를 지킬 것을 내세우지 않는다. 2천년전의 그들의 종교적 신념이 지금과 일치할 수 없을테니, 오랜 시간을 지내오면서 그들이 세상의 논리와 적절히 타협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병역 거부를 한다는 것은 한국적 정서의 보편적 사회 논리에서 병역 면탈을 목적으로 하는 것 내지는 우회적인 성실한 병역 이행자들에 대한 모욕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나와 함께 생활했던 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총들고 뛰는 우리는 뭐냐? 우리는 양심도 없는 놈들이냐?' 라는 말이다. 물론 이런 말들은 즉흥적이고 감정적 반발이다. 그러나, 그러한 반발에 대해 적실성 있는 설명을 할 수 없는 종교라면 교세 확장에도 사이비 논란에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결론은 '참 웃기는 놈들이다'이다. 이번에 판사가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켜주기 위해 병역을 면제 받을 수 있는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니, 왜 이리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이러한 생각이 병역 이행자로서 가지는 '마초 근성'과 '피해의식의 발로'라고 그들이 비난한다면 별로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와 같은 마초 근성과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유사시, 조국 수호를 위해서 전쟁터로 나간다는 것을 그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성은 비관하되, 의지는 낙관하라..
Melancholic Genesis™, Against All Od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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