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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超人)을 원하는 (가증스런) 사람들

대중들은 언제나 '영웅'에 갈증을 느낀다. 영웅의 존재는 그 자체로 대중들에게 희망이며 영웅이 해내는 기적적인 사건들 하나하나에 쉽게 열광하고 흥분에 휩싸인다. 그 분위기 속에서 대중들은 영웅에 대한 객관적인 가치 판단을 놓치기 쉽고, 곧잘 이상론에 휩싸인다. 영웅의 존재는 그만큼 매력적이고 영웅이 미치는 사회적 파장은 막대하다. 야구를 생전에 한 번도 안보고 야구 뉴스만 봐도 드라마 방송을 안해준다고 욕하던 내 어머니도 WBC 이종범과 이승엽의 활약에 대해서는 좋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영웅은 바로 그런 존재다. 그것이 영웅이 가지는 힘이며 상징성이다.

그러나 영웅이 등장하면 영웅을 시기하는 세력들 또한 등장하기 마련이며 그와 비슷한 치들이 규합하며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다. 그들은 영웅을 흠집내길 좋아하며 스스로를 '안티'라 명명하며 '안티가 있어야 영웅이 바르게 간다'라는 식의 자기 합리화 과정을 스스로에게 주입하며 반복적 암시를 통해서 어떠한 가책이나 반발심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난다. 그러한 심리적 방어선이 완성되면 그들이 쓴 회색의 가면을 통해 흘러 나오는 무책임하고 무가치판단적인 독설들은 그에 호응하는 또다른 황색언론과 만나 결합하여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여 상호간의 충돌을 야기한다.


[이번에 그들이 까대기 시작한 사람은 '안익태'다. 한 인간의 삶에서 절반이 넘는 40년이란 세월을 식민지 피지배인으로 살았을 우리 선조들의 고통과 좌절에 대해 추호의 관심도 없는 국내 대표적 인터넷 쓰레기 오마이뉴스(그들은 언론이라 볼 수 없다.)와 그와 유사한 치들은 우리가 영웅이라 칭하며 지내온 자들에게 작은 흠조차도 용납치 않는다. 인생의 2/3(안익태는 60년을 살았고 태어날 때부터 반식민지인이었다.)를 식민지인으로 살았을 당대의 지식인인 그에게 우리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초인적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 Photo : 안익태 기념재단]

나는 나른하고 힘없이 늘어지는 우리의 애국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프랑스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와 같은 잔인하나 힘있고 강한 민족의 열기가 느껴지는 애국가를 원한다. 그러나 오마이쓰레기가 운운하는 "안익태가 일제 말기에 친일로 변절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국가를 바꿔야 한다."라는 이유로 정말 애국가를 바꿔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그것에 반대한다. 이것은 내가 오마이쓰레기를 격멸(경멸에 대한 격한 표현으로 나만의 표현법)하는 감정적 요인이 완전히 배제된 나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한 나의 선택이다.

나와 우리는 안익태를 '인간 안익태'로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안익태는 '초인(超人)'이 아니다. 초인은 신화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국제사회의 시각에서 단순한 테러리스트일 뿐인 안중근 의사와 같이 자신을 죽여가며 자신의 절개를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대중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단순히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하마스에는 수백/수천명의 안중근 의사를 배출해 냈지만, 우리들 누구도 그들의 자살테러를 그런 존경어린 눈이 아닌 종교적 광신도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안익태는 인간이다. 그의 사회적 지위와 성공가도를 감안해도 40년 가까이 절개를 지킨 것만으로도 고통의 시대를 살아간 젊은 신예로서 참으로 대단한 인내를 해낸 것이다.

한국인들은 한 인간과 역사를 평가함에 있어서 '통일된 해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의 사건에는 하나의 해석만을 요구하며 '이런 면에서는 이렇고 저런 면에서는 저렇다'는 식의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해석에 대해서는 '양비론' 등의 갈등유발적 신조어를 창조해가며 매도하고 평가절하한다. 그런 단순함 속에서는 끝없이 새로운 갈등과 반목, 불신만을 조장할 뿐이다. 마치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민주적인 환경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어느 정권 못지 않는 갈등과 반목을 잉태하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지금의 정권이 하는 짓과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포용력이 부족하다. 우리에겐 때로는 작은 허물을 덮어준다거나, 나쁜 점 속에 가려진 좋은 점을 찾아내어 재평가해 주는 그런 사회적 여유가 고갈되어 있다. 민족의 독립 시기부터 스탈린의 지령으로 찬탁/반탁이 대립했고, 광복정부 수립 이후에도 이승만과 김구가 대립했고 여운형과 같은 노선이 다른 유력한 경쟁자들은 과감히 살해되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극한의 갈등과 대립을 경험하였고 그로 인한 뿌리 깊은 불신과 장기간의 군사독재, 그리고 군사정권이 국제 사회에서 유례가 없는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자 붉어져 나온 민주화 투쟁과 정치부패, 인권논란, 과거사 규명 등의 갈등과 반목으로 철저히 점철되어 버린 이 땅의 민중들에게 신뢰나 포용력이라는 말은 애초에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의 무덤 속에서 아직 다시 빛을 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Hedge™, Against All Od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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